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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 08

[동문][사랑, 36.5°C]어렵게 내디딘 모교기부의 첫걸음이 마음 속 무거운 짐을 덜어줍니다

권선홍 교수는 1972년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입학해 1976년 외무고시 1호 합격자가 된 자랑스러운 동문이다. 그는 대학 4년과 석사 2년을 합한 6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 수혜를 언젠가는 후배들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부채감을 평생 안고 살면서도 첫걸음을 떼기가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고 한다. 정년퇴임을 앞둔 나이가 되어서야 시작한 그의 기부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가 되면서 무거웠던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다. 행정고시반 장학금으로 300만 원을 선뜻 쾌척하며 그 동안 마음만 있었던 어려운 한 걸음을 뗀 것이다. 글 편집실 / 사진 홍승진 ▲ 권선홍(72 법학) 부산외국어대학교 외교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외무고시 1호 합격자이십니다. 법학을 전공하셨는데 사법고시가 아니라 외무고시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한국을 둘러싼 문제를 총체적으로 다루는 한국학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 시절엔 한국학이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시절이라 진로를 찾기가 어려웠어요. 고등학교 3학년 때 친구가 한양대학교에 장학금을 지원하는 고시반 장학생 선발시험이 있으니 함께 응시해보자고 권유했어요. 사실 그 당시엔 대학 갈 형편이 못돼, 고시가 뭔지도 모른 채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준다는 말에 응시를 했죠. 다행히 합격해 남들처럼 사법고시 공부를 시작했지만 제 적성과는 맞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2학년 1학기 때 한대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학술상에 응모했다가 인문사회분야의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되었죠. 그것을 계기로 한국학 공부로 전과하고 싶어 사학과 학과장님과 여러 차례 면담하며 방법을 찾아보았지만 여의치가 않았어요. 결국 고시반에 남기로 했지만 나중에 학문의 길로 나가려면 사법고시보다는 어학을 좀 더 공부할 수 있는 외무고시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2학년 2학기부터 외무고시로 진로를 바꾸었어요.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1호 기부자이십니다. 기부를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고시반 동기들 중에는 이미 장학금 되돌려주기 운동에 동참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 친구들에 비하면 많이 늦은 편이지요. 그동안 생활하다 보니 여유가 없기도 했지만,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어요. 천 단위, 억 단위의 기부자들도 많잖아요. 그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작은 금액이라고 생각하니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어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새 정년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더 늦어지면 안 되겠다 싶어 방법을 찾던 차에 마침 ‘파워엘리트 나무그늘 캠페인’ 소식을 들었어요. 고시반 장학금의 수혜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모금 캠페인이라 더욱 뜻깊은 것 같습니다. 교수님도 장학금 수혜자이십니다. 장학금이 교수님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요. 제가 전기도 없던 시골 출신인데다 경제적으로도 대학갈 형편이 못되었어요. 그런 와중에 한양대학교 고시반 공채 1기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당시 장학금 외에도 생활비를 매달 15,000원씩 받았는데 공장 노동자들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수준이었어요. 고시반 학생들이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합격생들이 많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 역시 모교의 지원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 자리에 있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권동문은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됩니다.' 라고 말했다. 요즘 학생들을 보면 격세지감을 많이 느끼실 것 같습니다. 조언을 해주신다면? 젊은이들은 누구나 자기의 세대가 제일 어려운 세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즘 젊은이들도 지독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클 것입니다. 제 막내아들도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그 절박함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요즘말로 ‘최선의 노력을 다 하라’는 말밖에 못해 늘 미안하지요. 자신이 좋아하거나 일생을 바칠 만한 목표를 정하고 20~30년 정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그 분야에서 세계 최고 고수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또한 취업 준비 등으로 힘든 일이 많겠지만 너무 경쟁에 매몰되지 말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모교 기부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에게 모교에 대한 기부는 학창시절 혜택을 받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였습니다. 엄청난 혜택을 받으며 공부를 했으니 최소한이라도 되갚아야 하는 거잖아요. 저로서는 부산 총동문회와 지난해 11월 창립 20주년인 한양산악회 모임에 열심히 참여했던 것도 그러한 생각에서였지요. 그럼에도 기부를 계속 미루다가 어렵게 첫발을 뗀 느낌입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으니 어렵게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시작하고 보니 조금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제 정년퇴임하면 경제적으로 더 여유롭지 못할 수도 있지만,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나름대로 기부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부의 어려운 첫걸음을 떼셨다고 하셨는데, 여전히 어렵게 느끼시는 분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정년퇴임을 앞두고 뒤늦게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캠페인의 1호 기부자가 되었습니다. 소액기부임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동문들께서 참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장학금 지원을 받으며 공부한 고시반 출신 선후배 동문들의 마음은 비슷하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십시일반 모은 기부금이 어려운 후배들에게는 매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2 08

[동문][사랑, 36.5°C] 큰 마음보다 살뜰한 맘으로 자주 나누고 싶어요

어느 날 갑자기 닥친 교통사고. 그날 이후 주변의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이 눈에 들어왔다는 임영란 동문은 그들을 위해 도서구입비 100만 원을 기부하기로 한다. 딸의 이런 마음은 자식을 잃을 뻔했던 아찔한 경험을 한 아버지를 움직였다. 같은 부모로서 세월호 가족의 슬픔을 그 누구보다 이해하는 부친 임재호 씨는 단원고 출신 학생들과 교통사고 피해 학생들을 위해 1,000만 원을 기부하며, 딸의 깊은 마음에 자식 가진 아비의 진한 마음을 더했다. 새해부터는 대중모금 캠페인 ‘Club 동행한대’의 후원자로도 나선 임영란 동문, 그에게 기부란 큰 맘 먹고 ‘한턱 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랬다면 아직 시작도 못했을 일, 일상 속에서 커피 한 잔 값을 아끼는 살뜰한 마음으로 아픈 이들의 마음을 보듬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한 일이라고 한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임영란(05 컴퓨터교육학) 동문 지난해 말에 발생한 교통사고로 통원치료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현재 경과는 어떠신지요? 임영란_ 졸업 후 임용고사를 거쳐 현재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근무하고 있어요. 지난 해 10월 말, 출장길이었는데 신호대기 중 갑자기 뒤차가 와서 추돌하는 사고가 있었어요. 사고 현장에서 강한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외상도 없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다음날 통증이 심해 병원에 갔더니 근육이 놀랐다며 5일치 약과 물리치료를 처방해 주어서 좀 참으면 괜찮아지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도 호전되지 않다가 결국 수업 중에 심한 두통으로 쓰러지게 되었어요. 알고 보니 뇌진탕과 편타손상이라 집중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군요. 경황이 없었을 텐데 교통사고가 기부를 결심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임영란_ 이번 교통사고를 겪으면서 우스갯소리로 ‘호의를 베풀면 호구가 된다’라는 말을 실감했어요. 몸도 아팠지만 가해차량 운전자의 비양심적인 행동으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제대로 된 배상을 받기 위해 직접 자동차 손해배상 보장법도 공부하고 많은 사례와 판례들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보다 더 억울한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히 쉽게 합의를 했다가 나중에 큰 후유증에 시달리며 결국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도 있더라고요. 사실 저도 정확한 배상을 받는 것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현재 치료를 꾸준히 받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공무원이라 병가 중에도 월급이 나오는 것에 감사함을 느껴 사회에 조금의 도움이 되고자 12월 월급의 반은 그들을 위해 기부하자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로 휴학한 후배들을 위한 도서구입비’라는 특이한 용도로 기부를 하셨습니다. 임영란_ 교통사고가 기부의 계기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교통사고를 당한 후배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어요. 제가 큰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다면 생활비나 학비를 지원했을 테지만 소액기부였기 때문에 어떤 용도로 기부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대학 다닐 때 전공서적 구입비용이 늘 부담이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비록 적은 금액이라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조금 담아 보았습니다. 기부하실 때 아버님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기부를 하게 된 배경은요? 임영란_ 아버지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입니다. 제가 재수를 결정했을 때도, 임용고사 준비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을 때도 항상 저를 믿고 응원해 주셨어요. 현재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계시는데 그동안 일과 가족을 챙기시느라 여행 한 번 마음 편하게 다녀오신 적이 없으셨어요. 그래서 아버지 회갑기념으로 1월에 가족끼리 유럽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제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치료기간이 길어지게 되어 결국 여행을 취소하게 되었어요. 죄송한 마음에 여행적금으로 모은 돈을 회갑선물로 드렸더니 그 돈을 선뜻 단원고 출신 학생들에게 기부하자고 하셨어요. 학창시절에도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임영란_ 학창시절 ‘한양어린이학교’라는 동아리 회원으로 활동을 했어요. 한양대학교병원에 입원한 소아암환아들에게 교육봉사를 하는 동아리로 SK, 굿네이버스 등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좀 더 다양한 교육활동들을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졸업 후에는 동아리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후배사랑장학금이라는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원하다가 2017년에 ‘한양어린이학교 후배사랑 장학기금’을 만들었어요. 사실 이 기금을 만들면서 후배들을 위해 모교에 기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 임동문은 '이번 기부는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본 기억이 있는 후배라면 나중에 또 누군가를 도울 줄 아는 선배로 성장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담아 시작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버님은 기업가로서 평소에도 지역사회에 기부를 많이 실천하시는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님의 기부가 아버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임재호_ 제 영향이라고 하기는 쑥스럽습니다. 사고 후유증이 심해져 많이 놀랐을 텐데도 그 와중에 기부를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 대견하지요. 제 사업장 인근에 단원고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단원고 아이들을 생각하면 늘 마음이 무거웠어요. 마침 딸아이가 자기 모교에 기부를 한다고 하니 단원고 출신의 학생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저는 3~4년 전까지만 해도 지독한 워커홀릭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다간 일만 하다 죽겠구나 라는 생각에 뒤늦게 대학공부를 시작해 작년에 졸업했습니다. 대학 동기들 중 딸 또래의 친구들이 어려운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본격적인 기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해에는 금전적인 기부 외에도 직접 현장에 나가는 봉사활동도 참여할 계획입니다. 사업장 인근에 외국인 노동자나 다문화가정이 많거든요. 이번 기부를 계기로 2018년 1월부터는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기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동문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임영란_ 한 달에 다섯 잔의 커피를 참는다면 ‘Club 동행한대’ 1구좌를 개설할 수 있습니다. 저도 커피를 무척 좋아하지만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없는 날도 있어요. 그런데 ‘Club 동행한대’ 후원자가 된 이후로는 ‘이런 날은 한 구좌 개설할 수 있겠다’ 싶으니까 업무 스트레스까지 줄어들더라고요. 커피 한 잔 값의 큰 힘을 여러분도 실천해 보셨으면 합니다.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2 06

[동문]창업 교육의 학문적 가치를 입증하다

대부분의 대학교는 창업지원교육을 시행한다. 단기적으로 보면 학생들에게 취업 이외의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자신만의 직업을 개척하는 것을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런 만큼, 교육이라는 틀에서 이뤄지는 창업지원교육이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창업 역량을 키워주는지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이영근 동문(경영학부 08)은 이러한 편견을 깨고 대학교 내 창업 교육의 실질적인 효과를 증명하는 논문을 써내 창업학 논문 대상을 수상했다. 열정과 집념이 성과를 드러내다 “창업학을 연구한 지 1년 반 만에 '2018년 창업학 논문' 대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기쁘네요.” 이번 수상에 대해 이 동문이 밝힌 소감이다. 상을 수상하면서 기존에 연구하던 창업에 대해 더 깊은 애정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 동문은 창업학에 대한 확고한 열정과 의지를 보였다. “앞으로 한국의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의 성장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싶고, 더욱 연구에 매진하여 한국을 빛내는 대표 창업학자가 되고 싶어요.” 이영근 동문에게 창업학 논문 대상을 수여한 학회는 ‘USASBE(United States Association for Small Business and Entrepreneurship)’로, 미국 중소기업 및 창업학 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차 학술대회다. 1981년 설립돼 38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이 단체는 세계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 및 창업학 학회로 약 5,000여명의 학자들이 속해 있다. 이 동문은 이 학술대회에서 수많은 경쟁과 검증을 거친 결과,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2018년 학술대회에는 24개국 254개 대학교가 참여해 400편 이상의 논문을 제출했어요. 제 논문은 ‘교육’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을 거쳐 대상 후보에 올랐고 ‘이론’, ‘실증, ‘신인’ 부문 최우수상 수상작들과 경쟁해 최종 대상으로 선정됐습니다.” ▲이영근(경영학부 08) 동문에게 대상을 수여한 'USASBE'는 미국 중소기업 및 창업학 협회에서 주최하는 연차 학술대회로, 세계 최대 규모의 창업학 및 중소기업 분야의 권위있는 학회다. (출처 : International council for small business) 또한, 논문 대상 수상 이외에도 이 동문은 카우프만 재단(Kauffmann Foundation)으로부터 장학금을 지원을 약속 받았다. “카우프만 재단은 기업가정신과 창업 문화 육성 사업을 펼치는 가장 큰 단체 중 하나예요. 이 단체에서 장학금을 받고, 창업학과 경영학의 대가들에게 직접 축하 인사를 받게 돼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질 않네요.” 미리 알고 창업하면 더 좋다 그를 대상으로 이끈 논문 이야기를 놓칠 수 없다. 이 동문은 ‘대학교 창업 교육이 창업 능력 향상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고 설명했다. “저는 이번 논문을 통해서 학생들의 창업가적 역량이 대학교 교육을 통해서 향상될 수 있는지 연구했어요. 지도교수님인 패트릭 크라이져(Patrick Kreiser) 교수와 함께 창업과 교육의 관계를 고민하며 논문을 진행했죠.” ▲이영근 동문(경영학부 08)은 'USASBE'에서 2018 창업학 논문 대상 수상의 쾌거를 올렸다. (출처 : 이영근 동문) 이 동문이 미국의 주립대학교 학부생 92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경영대학과 공과대학에서 제공되는 교과과정과 과목들을 분석한 결과, 대학에서 제공하는 창업 관련 교육이 대학생들의 창업 역량을 강화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창업 관련 교육들이 대학생들의 창업가적 능력을 키우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된 거죠. 또한 창업 경험이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으면, 창업을 더욱 꿈꾸게 되는 경향이 있었으며,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 일수록 창업가적 능력이 높았습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가 쉽게 이루어진 건 아니다. 이 동문은 수많은 커리큘럼을 일일이 분석하고, 학부 수업들과 비교하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경영대학 인증(AACSB)과 공과대학 인증(ABET)에서 제공하는 커리큘럼을 분석하고, 미국 대학교의 실제 학부 수업들과 비교하는 것에 많은 시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동문에겐 이 주제를 연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창업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만큼, 창업 관련 교육들의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예를 들어, 창업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창업 교육이 실질적으로 학생들의 창업으로 연결되는지 등을 논문을 통해서 실증적으로 풀어내고 싶었죠.“ 현 이슈에 대한 이 동문의 탐구정신과 열정이 실증적인 성과를 맺은 셈이다. 창업을 꿈꾸는 학생들에게 창업을 원하고, 창업 교육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만, 아직까지 감이 안 잡히는 한양인도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학생들에게 이영근 동문은 모교의 지원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조언을 건넨다. “학부 시절 저는 한양대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캡스톤디자인 수업을 통해서 컨설팅을 접했고, 수업 중 화장품 회사 대표를 직접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해외인턴 프로그램을 통해서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에 방문하여 실제 경영환경을 접할 수 있었어요. 이처럼 한양대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쌓은 경험들이 현재 창업학을 공부하는 데 밑거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동문은 창업에 필요한 마음가짐 또한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가 지난해에 한국 중소기업 임원진 1,4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경영자들은 공통적으로 높은 혁신성, 진취성, 그리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해 이 동문은 "적극적인 마음가짐과 자발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창업 그 자체가 학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이영근 동문은 후배들이 창업을 어려운 과업이 아닌, 파고들 가치가 있는 학문으로 받아들이길 부탁했다. (출처 : 연합뉴스) 글/채근백 기자 cormsqor12@hanyang.ac.kr

2018-02 05

[동문]꿈이 있으니 길이 있고, 그렇기에 행복하다

막연하게 살기도 벅찬 요즘이다. 누구는 크게 꿈을 꾸라며 자꾸만 채찍질한다. 하지만 어떡해야 이룰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고민조차 들지 않아 절망하는 청춘들이다. 스스로 말하길 ‘무모하게 살아왔다’던 김재빈 동문(성악과 09)은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갔다. 특유의 무모함은 무대를 펼치며 꿈도 펼치는 그를 만들었다. 팝페라 가수 테너 김재빈 동문을 만났다. ▲에클레시아(Ekklesia)의 리더이자 팝페라 테너 가수, 김재빈 동문(성악과 09)이다. (출처 김재빈 동문) 무작정 찾아다닌 공연 기회 김재빈 동문은 주로 에클레시아(Ekklesia)라는 그룹으로 활동 중이다. 에클레시아는 김 동문이 졸업하면서 만든 그룹으로 이름은 그리스어로 ‘부르다’(to call)라는 뜻을 갖고있다. “관객들이 '우릴 불렀다'라는 뜻을 주로 쓰고 있어요. 종교적으로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는 뜻도 있죠. 팀 이름을 짓고자 하던 중에 친누나가 툭 던진 단어가 그룹의 정체성이 됐어요. 다른 이들에게 물었을 때 ‘꽃 이름 같다 예쁘다’는 얘기도 있어서 주저할 이유가 없었죠.”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학창시절 유엔젤보이스(UangelVoice)라는 팝페라 그룹에서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나름 이름을 알린 바 있다. 그럼에도 막상 함께한 단원 몇 명과 함께 에클레시아를 결성했을 때 맞닥뜨린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이름을 알려야 섭외가 들어오는데 공연이 없으니, 그럴 기회도 부족했다. 무명의 악순환이었다. 김 동문은 에클레시아 결성 초기를 떠올리면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만큼 힘든 나날이었다. “무작정 공연장소를 찾아다니며 ‘우리를 무대에 세워달라. 페이는 받지 않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유엔젤보이스 시절 알게된 팬분들을 통해 공연 섭외도 조금씩 받을 수 있었고요. 그렇게 반년은 거의 무보수였고 , 2년이 지나니까 서서히 페이도 받았던 거 같아요.” 무작정 했던 보험설계사도 또 다른 기회로 김 동문은 예술가로는 특이하게 보험설계사로 일한 경력이 눈에 띈다. 이에 김 동문은 “얻은 것도 많은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그룹 리더로서, 그룹 이름의 앨범이 없다는 점이 무척 아쉬웠어요. 재정적으로 불안한 상황에서 팀원들에게 돈을 걷는 것도 미안한 상황이었죠. 한 4개월 공연과 병행하면서 처음 목이 쉬는 경험도 하며 결국 그만뒀어요. 고객들께도 죄송했지만 오히려 ‘너가 음악에 전념하길 바란다’고 응원해주셨죠. 그렇게 정리하고 나온 보험회사가 팀에게도 또다른 기회가 됐어요.” ▲보험회사와의 인연은 일반인CF에도 나가는 기회도 안기는 등 김재빈 동문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사했다. (출처: 김재빈 동문) 보험회사에선 보험설계사를 교육할 때 설계사와 고객 사이의 여러 감동 이야기를 들려준다. 설계사들의 심리적인 면을 보강하기 위해서다. 평생 음악만 하다 접한 낯선 이야기는 김 동문에게 새로운 자극이었다.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획한 공연은 다른 보험회사와 인연을 맺어줬다. “노래 사이사이에 메시지를 얹어요. 가령 포기하지 말라는 얘기를 위해 ‘등산을 하는데, 너무 힘들어 지름길을 찾았지만 결국 포기하지 않는 길이 지름길이더라’는 말을 하죠. 편법은 없다. 그러고서 ‘포기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 노래를 들려주겠다’하는 거예요." 이 공연은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인정받아 보험회사와 장기적으로 계약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김 동문과 그룹 에클레시아에 또 다른 원동력이 됐다. 단복도 맞추고, 팬들을 위한 공연도 기획하고. 이렇게 쌓인 프로필은 에클레시아를 증명하는 이력이 돼 더 많은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결국 포기하지 않고 가야겠구나, 앞으로도 포기 않을 이유가 됐죠.” 지금 에클레시아는 자유롭지만, 서로가 필요할 때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함께한다. ▲지난 2017년 에클레시아 팬들과 만난 자리. "이제는 혼자가는 길이 아녜요." (출처: 김재빈 동문) 은사님을 만난 값진 경험 에클레시아 결성 초기도 힘들었지만, 한양대를 오기까지도 김 동문에게 있어 잊지 못할 시기다. 지방의 한 대학 성악과에 진학했던 김 동문에게 우연히 같은 부대를 간 동기가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무작정 상경하자던 그의 설득에 넘어갔다. “큰 물로 가자던 그 말이 그땐 그렇게나 달콤했죠.(웃음) 군대서 받은 돈을 모아 휴가 때마다 서울로 가서 박흥우 선생님께 레슨을 받았어요.” 이제는 10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김 동문에게 그의 이름 석 자는 잊지 못할 은혜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레슨비도 간신히 내던 그를 박대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가르쳤다. “제대한 후에는 아예 ‘너 형편 어려우면 그냥 (돈 없어도) 가르쳐주겠다. 와라’ 하셨어요. 정말 큰 은혜였죠.” 박 선생님 밑에서 열성을 다하는 한편, 생활비를 구하고자 온갖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25살이 돼서야 김 동문은 한양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군대 전역 후 2년만이다. “식당, 카페, 배달, 용역 등 안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어요. 그렇게 들어간 학교에서 곽신형 교수님을 만났죠.” 한양대 명예교수인 곽신형 교수(성악과)를 사사하게 됐다. 가정형편을 알기에 많이 챙기고, 더욱 보듬어 주던 곽 교수 덕에 김 동문은 위로도 많이 받았다. 그리고 3학년이 될 무렵 곽 교수가 팝페라 그룹 유엔젤보이스 입단을 추천하며 김 동문의 팝페라 입문이 시작됐다. “그때만 해도 팝페라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어요. 저 역시 ‘왜 저를?’하는 마음도 있었죠. 그런 계속 설득하셨어요. 경험이 될 거다. 그리고 교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입단을 준비했죠.” 유엔젤보이스와 남은 학부시절을 함께했다. 성악만 해온 김 동문에게 팝페라는 조금 생경했다. “마이크를 쓰지 않다가 쓰려니 무척 낯설었어요. 내 귀에 들리는 내 목소리. 지금은 익숙해졌죠. 경험이 쌓이면서 팝페라라는 장르가 익숙해졌던 거 같아요.” 당시를 회상하면 “좀 많이 무모했었다”며 웃는 김 동문이다. 하지만 그 무모함은 결국 에클레시아와 지금의 김 동문을 만들었다. 무모하게, 하지만 주저않고 지하철에서 선보인 공연 무대는 ‘왜 음악을 하는가’에 대한 답변도 더해줬다. 공연 시장이 침체기이던 2014년 중순, 에클레시아는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에서 제공하는 공연무대를 지원받아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그렇게 공연을 하던 어느 날 한 모녀가 유독 눈에 밟혔다. “아이는 공연 내내 열중하고 어머니는 왜인지 핸드폰을 틈틈이 보곤 했죠. 그렇게 1시간 공연을 다 본 모녀는 떠났어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케이크과 커피를 사들고 오신 거예요. 사진을 요청하면서 말씀하셨죠. ‘원래 음악을 안 듣는 아인데 이 무대는 계속 보고 싶어해서 과외도 미루고 보게 해줬다. 너무 고마운데 현금이 없어 이렇게나마 보답하고 싶다.’ 그때 행복해하던 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떠올라요. 내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서울메트로(현 서울교통공사)의 기획으로 열린 무대에서 만난 모녀는 김재빈 동문에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안겼다. (출처: 김재빈 동문) 역경이 있었지만, 꾸준한 노력들은 어느샌가 보답으로 돌아왔다. 어려움에도 당당했다. “학창시절 생계 관련 장학금 덕에 부담을 덜었어요. 낼 서류도 많았지만, 부끄럽지 않았죠. 등록금 내준다는대. (웃음)” 그는 즐거우면 무조건 한다. “바보였지만, 거절이 두렵지 않아 문부터 두드리고 보는 바보 였어요.” 김 동문의 삶의 궤적은 그렇게 두드리며 만들어졌다. “해보고 나니까 ‘되네?’ 했던 거 같아요. 보험회사와도 콜라보가 됐잖아요? 앞으로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공연을 기획해가는 게 꿈이에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물론 공연과 음반, 사회공헌도 함께해야죠.” 꿈이 있었기에 힘이 든 것도 잊고 살아왔고, 지금도 꿈이 있어 행복하다는 김 동문. 행복은 길이 있기에 있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더 많은 영상을 에클레시아 공식 유투브 계정에서 볼 수 있습니다. 클릭시 이동)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8-01 31

[교수]환자 중심의 의료보험 시스템을 구축하다

“나의 위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의료 윤리 지침서인 ‘히포크라테스 선서’ 내용 중 일부다. 건강보험 제도 개선에 이바지해 지난해 12월 29일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받은 고용 교수(의학과) 는 이러한 ‘명예’를 연신 강조했다. 교수로서, 한양대병원 신경외과 의사로서, 그리고 다양한 학회에 몸담고 있는 학자로서의 삶을 사는 고 교수. 그의 신경은 오로지 환자를 향한다. 국민과 병원 모두를 위한 보험 개선 보건복지부 산하 준정부기관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하 심평원)은 요양급여 심사와 적정성 평가를 하는 곳이다. 평가 항목에는 병원도 포함돼 있는데, 이때 심평원에서는 해당 병원이 보험 기준을 따르면서 진료를 보고, 투약을 했는지 확인한다. 만약 환자를 살리기 위해 정해진 급여 기준을 준수하지 않고 무작정 항생제 양을 늘리면, 의료비는 삭감된다. 병원은 의료비를 건강보험공단에 청구하는데, 심평원의 평가에 따라 의료비가 삭감되면 그 차액은 병원의 몫이 되는 것이다. 지난 11월 귀순한 북한군의 외상치료를 맡은 이국종 교수도 이런 이유로 병원의 적자가 늘 수밖에 없는 상황을 토로했다. 고 교수는 병원이 환자 치료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변화를 모색했다. “의학은 원래 사례와 학문을 결합한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에요. 써야 하는 항생제의 양도 법칙처럼 정해져 있죠. 하지만 환자마다 사용되는 양이 다를 때가 많아요. 똑같이 찢어진 부위더라도 누구는 많이 써야 살아나고, 누구는 아니니까요. 이런 차이 때문에 병원과 심평원 사이 분쟁이 빈번한 겁니다.” 이 상황에서 고 교수는 4년 동안 모은 진료 및 수술 사례를 바탕으로 ‘신경외과 보험진료 지참서(급여기준 해석 및 청구 요령)’와 개정판 등 두 권의 책을 냈다. “일종의 법전이에요. 이걸 참고해서 심평원이 병원을 제대로 평가를 했는지, 안 했는지 비교해보면 알 수 있으니까요.” ▲건강보험 제도 개선에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한 고용 교수(의학과) 가 저서 ‘신경외과 보험진료 지침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고 교수의 노력은 심평원에서 제도화 한 급여 기준을 탈바꿈 하기 충분했다. “급여기준에 걸려서 치료비를 주지 않을까 병원들이 전전긍긍하는 것을 해결하고 싶었어요. 이젠 환자를 살리기 위해 급여기준을 넘어섰을 경우, 사유를 정확하게 쓰면 그 상황을 인정해주죠.” 오로지 의사의 임무와 환자의 생명에 초점을 맞춰 개선한 보험제도로 고 교수는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환자의 생명이 최우선입니다 “사람 살리는 것이 의사가 해야 할 일이에요. 돈보다는 명예를 먼저 생각해야 하죠. 제가 의예과 학생들에게 항상 해주는 말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뇌출혈 증세가 나타난 할아버지를 받아주는 병원은 아무 데도 없었다. 당시엔 신경외과라는 곳이 없었고, 수술 가능한 의사 또한 부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 교수는 신경외과 의사의 꿈을 가졌다. 이제는 매 순간 뇌 관련 질환으로 찾아오는 환자들의 삶의 질을 책임지고, 정상적으로 돌려놓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 ▲한양대병원 3층에 위치한 신경외과 외부에 걸려 있는 고용 교수의 사진. 그의 전문 분야는 뇌 수술이다. 한양대 의예과에 입학한 후 고 교수는 공부에만 매진했다. “정말 하루 종일 공부만 했어요. 남는 시간에는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것도 주로 원서로 된 전공 책이었어요.” 성실한 학창시절을 보냈던 고 교수는 지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미국 피츠버그 의대(University of Pittsburgh School of Medicine)에 연수를 갔다가 조교수까지 올랐다. “저는 미국 사람들을 진료해서 돈을 버는 것 보다, 제가 가지고 있는 기술로 국민들을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어요.” 사명감을 따라 귀국한 고 교수는 한양대병원으로 돌아왔다. 앞으로도 건강보험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고 교수의 목표다. “한 환자를 정성 들여 치료하기 위해 충분한 가격을 의사들에게 줘야 하는데, 건강보험 값은 낮아요. 하지만 건강보험 가격을 인상하면 물가와도 결부되기 때문에 쉽지 않은 일이죠.” 전문성이 높은 의사에게 진료받을 시 추가 진료비를 지급하는 ‘선택진료비’가 기존에는 의료진과 병원에게 돌아가는 보상으로 적용됐다. 하지만 올해 선택진료비 폐지가 되면서부터 의료계 손실을 메워줄 보상이 없어졌다. 따라서 고 교수는 환자를 위한 의료서비스 개선을 위해서라도 건강보험 값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진료에만 그치지 않는 의사 고 교수의 손에 살아난 환자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심각한 외상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웠던 환자들은 그 덕분에 새 삶을 살 수 있었다. 그것을 동력으로 의사의 삶을 유지해온 고 교수의 정년퇴직은 머지 않았다. “은퇴 후, 저를 평생 지원해준 아내와 여행을 가고 싶어요. 적도 밑으로는 가 본적이 없는데, 여행으로 제가 보답해주고 싶어요(웃음).” 대한뇌종양학회 운영위원, 대한신경중환자학회 회장, 대한의료감정학회 이사, 근로복지공단 산업재해보상보험 심사위원 등으로 있는 고 교수는 미래에도 자신이 가진 의학 관련 지식을 공유하고, 의료 정책 개선에 더 기여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명예를 다시금 강조하며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잘 키우는 거에요. 여러분의 경쟁자는 여러분의 동료가 아니라, 세계입니다. 거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며 세계와 경쟁을 하길 바라요.” ▲”건강보험제도가 전체적으로 차츰 개선이 됐으면 좋겠어요. 부분적으로 제가 일조했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고용 교수는 웃으며 수상 소감을 전했다. 글, 사진/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1 25

[동문][희망, 100℃] 30년 전 각인된 한양인의 DNA가 여전히 우리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뛰고 있다

참석자 수 600명 육박, 밴드 가입 1,200명 돌파, 발전기금 모금액 3억 원 돌파. 지난해 10월 성황리에 개최된 ‘한양87 홈커밍데이’가 쓴 놀라운 기록들이다. 역대 최고의 기록들이었다. 행사가 끝난 후 입소문이 번지면서 동문 선배들 사이에서 “도대체 87학번 준비위원장이 누구였냐”고 묻는 이들이 많았다. 2017년 코스닥에 상장된 기업인 필옵틱스의 대표 한기수 동문이 그 주인공이다. 그는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은 물론, 스스로 1억 원이라는 통 큰 기부를 실천하며 모교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글 편집실/사진 홍승진 ▲ 한기수(87 물리학) 필옵틱스 대표이사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 밖으로, 창업 그리고 상장 한기수 동문은 삼성SDI에 입사하여 10년간 근무하다가 퇴사한 후, 자동화설비 제조사인 필옵틱스를 창업했다. 2017년에는 코스닥 상장까지 성공적으로 마쳐 기업의 성장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 결과적으로는 성공적인 선택이었지만, 직장인으로서 대기업이라는 안전지대를 떠나기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직장인들에게 입사 5년, 10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갑니다. 너무 바쁘다 보니 미래를 생각할 겨를조차 없죠. 그런데 입사 10년차가 가까워질 즈음, 10년 먼저 입사한 선배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나의 10년 후 모습을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10년 후에는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는데, 그때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입사 10년차 되던 해에 사표를 썼다. 퇴사 후 중소기업에 재입사해 중소기업의 생태계도 배우며 필옵틱스를 설립하기까지 4년 정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2008년 창업을 했으니 올해로 딱 10년째가 되었다. 직장인으로 10년, 경영인으로 10년이다. 직장인이 ‘주어진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경영자는 ‘새로운 일을 찾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직도 설계 실무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제가 엔지니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달라졌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특히 초창기부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예전보다 판단 속도가 빨라졌다고 하더군요.” 좀 더 냉철해지고 판단력이 좋아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판단기준이 단순해졌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사업성이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빠른 판단’ 못지않게 ‘현명한 판단’을 위해, 경영자로서 늘 긴장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한양87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역대급 기록을 남기다 이렇듯 바쁘게 살았으니 졸업 후 학교와의 교류는 어려운 일이었다. 모교를 다시 찾은 소감에 대해 ‘지하철이 연결되어 있어 놀랐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다. 지하철이 연결된 것이 2000년대 초반의 일이니 그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다시 학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다. 지난해 학교 측으로부터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졸업 후 학교와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반가웠습니다. ‘준비위원장’이라는 직함이 부담스러웠지만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없으니 행사 인사말이나 준비하면 된다고 해서 덜컥 수락을 했지요.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어요. 행사를 준비하는 100일간 학교에서 요구하는 것은 정말 하나도 없었어요. 다만, 우리가 알아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더군요. (웃음)” 87학번들이 주체가 되는 행사였기 때문에, 동기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준비위원장을 맡은 후 제일 먼저 한 일도 동기들을 밴드에 가입시키는 일이었다. 87학번 동문이 3,600명 정도 되는데 밴드에 가입한 인원이 무려 1,200명에 이르렀다. 전체 동문의 3분의 1이 가입한 셈이다. 행사 계획, 발전기금 모금 관련 게시물에는 하루에 수백 개 이상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참여율이 높았다. 한기수 동문은 일일이 챙겨 읽다가 노안이 찾아왔다며, 진담 반 농담 반 그간의 고생을 에둘러 말했다. 행사 당일 참석 인원이 600명에 달했고, 뒤풀이에 합류한 동문들까지 포함하면 실제 참석자 수는 훨씬 많았다. “이번 행사의 성공은 100일간 동기들이 내 일처럼 나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학교가 차려준 밥상에 숟가락만 얹듯이 참여하는 행사였다면 동기들이 느끼는 자부심과 성취감은 덜했겠죠.” 발전기금 모금 3억 원 돌파,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 87학번 홈커밍데이가 남긴 역대급 기록 중 모교 발전기금 모금을 빼놓을 수가 없다. 무려 3억 원이 넘는 기금이 모금되었는데, 홈커밍데이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규모였다. 얼마나 많은 동문들의 참여가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기수 동문은 그 공을 모두 동기들에게 돌리며, 기금을 사용함에 있어서도 87학번의 자취를 남기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동기들이 적극적으로 모금에 참여해주면 더욱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매칭기금’ 방식을 활용해 보았어요. 예를 들어 동기들이 1,000만 원을 기부하면, 제가 같은 금액을 보태서 2,000만 원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모금을 하다 보니 3억 원이나 모았어요. 다시 생각해 봐도 동기들의 호응과 참여가 없었다면 3억 원 모금이 가능했을까 싶어요.” 워낙 성공적인 행사였기에 준비위원장으로서의 소감도 남다를 법한데, 그는 ‘나의 일상이 홈커밍데이 전과 후로 완전히 바뀌었다’는 말로 소감을 대신했다. 행사를 마친 후에도 꾸준히 동기들과 모임을 가지고 있으며, 오는 3월에는 87학번 동기회도 정식으로 출범할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 한기수 대표이사는 학교에서 청년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한 ‘차세대 청년기업 육성기금’에 기부를 했다. 창업선배로서의 어려움이 반영된 마음으로 학교에서 지원하는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 지원 속에서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해보라는 당부의 뜻이다.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감 한기수 동문은 홈커밍데이 모금에 보탠 1억 원 이외에도, 재학생들의 창업교육 지원에 써달라며 1억 원을 기부했다. 또한 창업교육 지원과 물리학과 장학금으로 5억 원이 넘는 기부를 약정했다. 그는 모교의 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쁘다며, 이런 기회들이 더욱 많은 동문들에게 주어지기를 희망했다. “동문이라면 누구나 모교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바쁘게 살면서도 한양대 관련 기사가 나오면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입시철이면 대학 순위에 은근히 신경을 쓰게 되지요. 하지만 이런 관심이 바로 기부로 연결되기는 힘들어요. 저 같은 경우에도 모교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었지만, 선뜻 학교에 연락하기가 쉽지는 않더군요.” 한기수 동문은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자책과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고 토로한다. 그래서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 제안이 왔을 때도, 모교가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처럼 반가웠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창업을 준비하는 후배들을 위해 기부를 하게 된 이유가, 창업 선배로서 창업의 어려움을 잘 알기 때문이라고 털어놓았다. “사실 제가 학창시절 장학금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은 못합니다. (웃음) 오히려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에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만 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회사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도 호기심이 많은 친구들에게 먼저 눈이 갑니다. 실제로 업무해결 능력도 뛰어나더군요.” 그는 직장인으로서 가장 불행한 일이 ‘일의 선택권’을 가질 수 없는 점이었다며, 청년창업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강조했다. 학교에서 지원하는 창업 프로그램을 활용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일찍 해보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양인의 DNA가 각인된 선배로서, 모교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방법들을 계속 찾아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그는 홈커밍데이를 계기로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한양인의 DNA가 30년 만에 깨어나 머리와 가슴 속에서 힘차게 뛰노는 것이 느껴진다며, 이는 3,600명 동기들의 한결같은 심정일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너무 오랫동안 모교 발전에 무심했다는 미안함은 이제 접어도 되지 않을까. 동행한대 2017년 WINTER (제8호) 이북 보기

2018-01 24

[학생]마음을 담아 소리를 내다

하모니카에는 억지가 없다. 작은 호흡에도 소리가 난다. 박종성(오케스트라 지휘 석사 과정) 씨가 하모니카를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이유다. '아시아-태평양 하모니카 대회', '세계 하모니카 대회' 등 10군데가 넘는 곳에서 수상의 영예를 안고, 한양대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박종성(오케스트라 지휘 석사 과정) 씨를 만났다.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 하모니카 하모니카는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 좋고, 들숨과 날숨으로 간편하게 연주할 수 있는 자그마한 관악기다. 이 악기와의 만남은 박 씨의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 교사였던 어머니의 권유로 시작됐다. “여러 악기를 연주해봤지만, 하모니카를 불 때 제일 편안함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제 모습이 좋았죠. 하모니카 선생님과의 추억들도 꽤 많아서, 평생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하모니카와 함께 하고 싶었어요.” 박 씨는 처음 참가한 2002년 아시아-태평양 하모니카 대회에서 청소년 트레몰로 독주 부문 금상을 수상하며 부각을 나타냈다. “제가 상을 받을 때 최광규 선생님의 우는 모습이 잊혀지지 않아요. 선생님의 사랑에 처음으로 보답한 느낌이었어요. 좋은 연주자가 되면 선생님께 음악으로 갚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후 연주자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고등학교 시절 작곡 공부를 시작했다. “연주 곡 대부분이 다른 악기의 곡을 편곡해야 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수준을 높이기 위해 하모니카만을 위한 곡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죠.” ▲박종성 씨는 "하모니카를 부는 그 순간이 진실된 나의 모습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경희대 포스트모던 음악과 하모니카 전공으로 입학하며 국내 대학 하모니카 1호 전공자가 됐다. 단과대학 전체 수석으로 졸업 후, 꾸준히 대회에 참가한 박 씨는 ‘2005년 세계 하모니카 독일대회 트레몰로 독주 3위’, ‘2006년 일본음악 연주제 1위’ 등 좋은 성과를 냈다. 한편, 이 과정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뒤따랐다. 하모니카가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악기라는 점에서 생긴 편견 때문이었다. “하모니카로 뭐 먹고 사냐는 둥, 할아버지가 부르는 거 아니냐는 둥 처음엔 오기가 생겨 그 편견을 깨려고 했어요. 지금은 좋은 연주자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2009년 세계 하모니카 대회 트레몰로 독주 1위’을 석권한 박 씨는 당시 자작곡 ‘런 어게인(Run Again)’을 연주해 호평을 받았다. 어머니의 별세와 함께 다른 좋지 않은 일이 겹치며 슬럼프에 빠진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곡이다. 이외에도 자작곡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이니까’는 박 씨가 특히 아끼는 곡이다. “여러 사건이 해결 안 된 시점에서 지인에게 터놓고 고민을 이야기하던 중 영감을 받았어요. ‘뭐 어때? 너 마음이 제일 중요하지’라는 말에 힘을 얻었고, 30분 뒤 이 곡을 완성시켰죠.” ▲KBS 더 콘서트 하모니카 연주영상 끝없는 도전과 지휘공부의 시작 각종 영화음악, 드라마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등의 드라마음악, ‘2016 전주세계소리 축제’ 참가 등 박 씨는 꾸준히 다양한 장르의 음악 작업에 참여했다. “하모니카는 여러 장르에 잘 어울려요. 덕분에 고등학교 시절엔 클래식 작곡 공부, 대학교 때는 재즈, 탱고, 펑크, 국악 등 다양한 장르를 공부할 수 있었죠.” 장르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박 씨는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장르와 공부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곡 공부를 통해 곡을 만드는 원리를 깨달았고 연주적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박 씨는 더 높은 이상을 꿈꿨다. 그 과정 속에서 지휘를 알게 됐고, 현재 한양대 음악대학원에서 최희준 교수(관현악과) 사사로 오케스트라 지휘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박자와 듣는 귀, 카리스마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지휘는 이론, 역사, 인간의 심리, 무대 음향 등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수 있는 거더라고요. 같은 교수님 밑에서 박사과정도 공부할 예정이에요. 이제는 지휘자로서 콩쿨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부산 조수미 스페셜콘서트에 게스트로 참가한 박종성 씨(왼쪽). (출처: 박종성 페이스북) 영원히 무대 위 행복한 연주자가 되길 이토록 뛰어난 연주자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박 씨는 “무대에서 즐겁게 연주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대 전과 후 청중들의 모습이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무대 위에서 박 씨가 느끼는 행복이 고스란히 청중들한테 전해지기 때문이라고. 여전히 음악공부를 지속하는 그의 모습은 하모니카의 위상을 드높이는 것은 물론, ‘좋아하는 취미가 일이 될 경우 즐기기 어렵다’는 말의 반례를 보여준다. 작은 악기가 만든 기적에서, 또 다른 음악세계를 내보일 박 씨의 행보가 기대된다. 글/ 정민주 기자 audentia1003@hanyang.ac.kr 사진/ 이진명 기자 rha925@hanyang.ac.kr

2018-01 22

[동문]무거운 별 가슴에 새기고

지난해 말 국방부가 군 장성급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 인사에서는 총 110명이 진급했으며, 그중 77명이 준장으로 진급했다. 지난 1월 11일에는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준장 진급자들에게 삼정검(四寅劍)을 수여했다. 대통령이 직접 진급자들에게 삼정검을 수여한 것은 창군이래 처음이다. 대통령의 삼정검 수여는 국가를 위해 힘써달라는 준엄한 명령인 셈. 삼정검에는 육·해·공 3군이 일체가 돼 호국·통일·번영 이 세 정신을 달성하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래서 장군의 상징인 삼정검은 그 무게감이 남다르다. 위국헌신 군인본문(爲國獻身 軍人本分) 지난해 12월 말에 단행된 준장 인사에 자랑스러운 한양인이 이름을 올렸다. 삼정검을 가슴에 새긴 이상철 동문(경제학과 86)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동문은 ERICA 캠퍼스 학생군사교육단(ROTC, 이하 학군단) 출신으로 1990년 학군단 28기로 임관한 3,533명 중 유일하게 준장에 진급했다. 이 동문은 “장성 진급은 단지 직위 상승이 아니라 국가 안보와 군 발전에 막중한 책임감을 의미하기에 그 무게가 남다르다”며 “군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슴 속 깊이 새기고 군 본연의 임무완수에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로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월 11일 이상철 동문은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삼정검을 수여받았다. (출처: 이상철 동문) 이상철 동문은 현재 육군 제2작전사령부 소속으로 근무 중이다. 준장 진급 후 진급신고, 삼성검 수여식, 장군 진급자 교육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쁜 와중이지만 이 동문은 모교 방문도 잊지 않았다. 진급 직후 한양대 학군단을 찾아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지난 1월 11일 한양대 신년 인사회에 참석해 모교 관계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30년 외길 군인 인생 이상철 동문은 말 그대로 ‘군인’의 삶을 살았다. 1986년 대학 입학 후 1988년 한양대 학군단에 지원했다. 입학부터 이 동문은 학군단 지원을 희망해왔다. 이 동문의 할아버지는 6.25전쟁 중 전사했고, 아버지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시 병사로 토벌 작전에 참전했다가 부상을 입은 국가보훈대상자다. 이러한 배경 덕에 이 동문은 어린 시절부터 군인의 삶을 꿈꿔왔다. 적성과도 잘 맞았다. 남자로 태어나 국가 안보에 헌신할 수 있는 직업을 갖는다는 것이 스스로 큰 영광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 동문이 학군단에 지원한 1988년에는 총 103명이 장교로 임관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3, 4학년 2년간 훈련을 받았습니다. 학업과 훈련을 병행하기 때문에 종종 어려움도 있었지만 동기들과 함께 우정을 키우면서 즐겁게 지냈죠. 아쉽게도 극히 일부만 군에 남았고, 대부분의 동기들이 사회로 진출했습니다.” 군에 남은 이 동문은 707특공연대 소대장을 시작으로 특공대대 작전항공장교, 강원도에서 2차 중대장과, 연대 및 사단 작전장교를 거쳐 1차로 소령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구대 학군단 교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실무자 등의 생활을 거쳐 1차로 중령 진급, 53사단 해안대대장 및 사단 작전 참모 등으로 근무하면서 대령으로 진급했다. 53사단 해안연대장, 2작전사령부 관리과장 등을 거쳐 이번 인사를 통해 준장으로 진급했다. 돌아보니 어느덧 29년 11개월. 군인으로 살아온 30년이었다. 이 동문은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라며 30년 군 생활을 겸손하게 회상했다. 그러나 이 동문은 단 한 순간도 맡은 업무를 게을리 한 적이 없는 타고난 노력파다. 30년간 진급의 관문마다 1차로 합격해 군인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동문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다. 이 동문은 “내 욕심은 내려놓고 최대한 양보하면서 힘든 것은 내가 한다는 자세로 임했다”는 삶의 자세를 겸허하게 전했다. ▲이상철 동문은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솔선수범 하는 장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출처: 이상철 동문) 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 힘든 순간도 많았다. 직업군인이기에 근무지를 자주 옮겨야 했다. 30년 동안 무려 19번에 걸친 이사로 인해 자녀들이 잦은 전학과 학업으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볼 때면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듯 했다. “내가 군인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강요하는 것 같아 미안함이 컸죠.” 그러나 이내 이 동문은 “아들, 딸이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고 어느덧 대학생이 됐다”며 “잘 커줘서 고맙고 흐뭇하다”고 말했다. “저의 수고가 온 국민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할 때에 가장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 동문의 가치관에는 그가 뼛속까지 군인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난다. 자신의 노력이 국가와 인류 발전에 기여한다면 이 동문에게 그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고. 끝으로 이 동문은 준장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막중한 사명감으로 하루하루 임할 것이라는 앞으로의 다짐을 전했다. “진급은 더 많은 권한을 의미하지만 그 권한을 좋은 곳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정신으로 솔선수범하는 장교가 되고자 노력할 것입니다. 또 군 문화 역시 개선하며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군을 만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글 /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2018-01 17

[동문]기술고시, 공익 기여라는 꿈의 발판이 되다

자연과학 분야의 인재를 선발하는 국가고시인 '5급 기술 국가공무원 공개경쟁채용시험(이하 기술고시)'. 2017년 기술고시 최종합격자 73명 중 한양대 출신은 무려 15명이었다. 그중 권용은(기계공학 13), 박성열(전기생체공학 12), 전의건(건축공학 08) 동문과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주요직렬 4개에서 수석합격의 기쁨을 맛봤다. 수험기간과 택했던 공부 방법은 각자 달랐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된 목표를 향해 전심전력했다. 기술고시 합격을 통해 꿈에 한층 더 가까워진 전의건 동문과 조원담 씨를 직접 만났다. 마라톤과 같았던 수험생활 “2차 시험의 마지막 과목을 치르기 전날, 수많은 유성이 저에게 쏟아지는 꿈을 꿨어요. 상서로운 기운과 함께 다음날 시험장에 입실했는데, 제가 특별히 잘하는 분야의 문제가 나와서 수석합격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양대 기술고시반에서 꾸준히 공부를 이어나간 전의건 동문은 4년 만에 합격과 수석합격,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다.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는 직업을 원했던 전 동문은 20살 때의 진로 탐색 시간을 통해 기술고시를 처음 알게 됐다. 항상 관심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될 줄 몰랐던 그는 학군단 전역 직후 고시반에 들어갔다. “살아가면서 뭘 해야 의미가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기술고시가 가장 가치있는 길이었어요.” ▲”공공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돼서 봉사활동도 했었어요. 기술고시에 응시한다면 제 전공도 살릴 수 있고, 더 큰 범위에서 공익 달성에 기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전의건 동문(건축공학부 08)은 지난 2014년 6월에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1, 2, 3차 시험이 모두 처음이라 어떻게 시험을 봐야 할지 걱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전공시험에 임하는 마음으로 시험을 쳤어요. 그 마음가짐이 저를 합격의 길로 인도해준 것 같아요.” 학교 재학 중 기술고시를 급하게 준비한 조원담 씨는 지난 2016년 11월에 공부를 시작해 준비 12개월 만에 당당히 합격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빠듯한 시간 동안 쉴새 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었던 그다. 평소 공직자인 아버지가 헌신적으로 국가를 위해 일하는 모습도 조 씨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제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나 이루고 싶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기술고시가 제일 적합했다고 생각해요.” ▲조원담(화학공학과 4) 씨는 ”합격도 불확실한 상황이었다"며 "준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올해는 정말 기대를 안 했는데, 운이 따르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합격 소감을 전했다. 반복적으로, 또는 효율적으로 전 동문과 조 씨가 선호한 공부 방법은 달랐다. 반복적인 암기 학습을 선호했던 전 동문은 황농문 저자의 <몰입>을 읽고 감명을 받아 공부할 때 적용했다. “한 가지 문제에 대해 골똘히, 그리고 자주 생각하면 효율이 극대화된다는 내용이었어요. 저도 수험 기간 동안에는 공부하고자 하는 것을 종일 생각했어요." 공부와 수영을 병행하던 그는 아침에 수영하면서도 공부했던 것 중 모르거나, 헷갈리는 것들을 연상했다. 밥을 먹거나, 샤워하거나, 잠자기 직전에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갔다. "하다못해 꿈속에서까지 나왔던 것 같네요." 조 씨는 “기출문제를 잘 본 것이 단기간에 합격할 수 있던 방법”이라고 말했다. 미리미리 해둔 전공 공부 덕에 수월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이 실제 시험에서 많이 출제돼요. 그런 관련 수업들 위주로 수강했던 것 같아요. 그 지식을 기반으로 기출문제를 보며 출제유형을 익히고, 출제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습니다.” 4학년 1학기 재학 중 2차 시험 준비를 해야 했던 조 씨는 어느 것을 우선순위로 둬야 할지 고민했지만, 부담이 적은 과목 위주로 선택한 결과 2차 시험에 시간을 더 할애할 수 있었다. ▲’굴을 파야 금을 얻는다.’ 하나의 관문 기술고시를 통과한 두 사람의 미래 공직자로서의 모습이 기대된다. 같은 시기, 고시반에서 상주하다시피 했던 전 동문과 조 씨는 고시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다음은 전 동문의 설명. “물리적 혜택은 기숙사와 식대, 그리고 공부 장소를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받는 거예요. 또 다른 혜택으로는 선배들이 구축해놓은 자료들로 다른 수험생 친구들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죠.” 또한, 일주일에 같은 과 수험생들끼리 한 번씩 모여 스터디를 한 것도 큰 도움이 됐다고. “진도를 정해놓고 같이 공부를 하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서로 공유하면서 보완할 수 있었어요.” 조 씨는 힘든 순간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돼준 팀원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원대한 목표를 향해 기술고시라는 큰 장벽을 넘어선 두 사람의 추후 계획은 구체적이었다. 전 동문은 국토부 녹색건축과에서 일하는 것이 목표다. “궁극적으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요. 그게 사실 제일 어렵잖아요. 저를 보고 사람들이 ‘저 사람 일 참 잘한다’라는 생각을 했으면 해요. 공무원으로서 국가에 기여한 후, 다른 나라로부터 제가 진행한 사업이나 정책이 본받을만하다는 평을 받고 싶네요.” 조 씨는 산업부에서 에너지 수급을 위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에너지 불안정이 국가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에너지 안정화를 위해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2018 기술고시 1차 시험이 머지않은 지금. 전 동문과 조 씨는 수험생들에게 가장 간절한 것이 응원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해준 사람은 부모님이었다. 조 씨는 시험 응시에 용기를 북돋아준 부모님의 지지 덕분에 수험생활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전 동문도 매주 학교에 찾아온 부모님의 응원에 감사함을 표했다. ▲인터뷰가 진행됐던 HIT 건물 앞에 걸려져 있는 플랜카드 앞에서 두 사람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글/ 유혜정 기자 haejy95@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

2018-01 08 중요기사

[학생]너와 나의 상상 속 서울 이야기를 담아내다

서울시가 지난 2015년 서울시 브랜드를 아이서울유(I·SEOUL·U)로 새롭게 선정했다. 아이서울유는 ‘너와 나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서울을 중심으로 너와 내가 이어져 모두 공존한다는 의미를 담고있다. 그렇다면 너와 나, 우리는 과연 서울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서울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이야기를 두 명의 한양인이 영상으로 담아냈다. 그곳엔 우리가 몰랐던 숨은 서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상 속의 서울을 말하다 서울시가 지난 해 12월 7일 ‘아이서울유’ 스토리텔링 공모전의 최종 수상작 40여 편과 수상자를 공개했다. 이번 공모전은 10월 20일부터 약 한 달간 열렸으며, 총 645편의 글, 영상, 포스터가 접수됐다. 심사는 전문가 심사와 온라인 시민 투표 방식으로 진행됐다. 서울시 브랜드 ‘아이서울유’를 주제로 너와 나의 자유로운 서울 이야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형식이다. 치열한 접전 끝에 대상의 영광이 한양대 최현준(엔터테인먼트디자인학과 3), 남정연(커뮤니케이션디자인 3) 씨에게 돌아갔다. ▲최현준(엔터테인먼트디자인학과 3), 남정연(커뮤니케이션디자인 3) 씨가 출품한 ‘너와 나의 상상 속 서울이야기’ 영상 이들은 ‘너와 나의 상상 속 서울이야기’를 주제로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일들이 일어나는 서울의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서울의 시민들은 사실 자석에 이끌려 다니며, 멸종된 줄 알았던 티라노사우르스가 바삐 움직이며 에스컬레이터를 작동한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을 완성하는 빌딩들은 저마다 불빛을 깜빡이며 서로 수신호를 주고 받는다. 뻔해 보였던 서울의 일상에는 사실 숨겨진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들은 기발한 상상으로 서울시의 일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시상식 현장의 모습 (출처: 너와 나의 서울이야기 페이스북) 시상식은 지난해 12월 8일 서울역에서 진행됐다. 시상식에는 단국대·성균관대·가톨릭대 등 12개 대학의 응원 동아리로 구성된 대학연합청년응원단 80여 명과 함께하는 플래시몹도 등장했다. 이색적인 구성으로 많은 시민의 눈길을 끌었다. 대상을 수상하며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 두 사람에게도 뜨거운 박수가 이어졌다. 서울시는 “스토리텔링의 본질인 작가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이 돋보였고 서울시의 흥미로운 일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심사평을 전했다. 최 씨와 남 씨는 “대상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며 “기대 이상의 결과에 정말 기쁘다”는 소감을 밝혔다. 첫 공모전에서 대상까지 공모전 출전은 최 씨의 아이디어였다. 우연히 공모전을 알게 된 최 씨가 후배인 남 씨에게 출전을 제안했다. 같은 디자인 전공자로서 서로 호흡이 잘 맞을 것 같았다. 남 씨 역시 공모전 출전을 흔쾌히 수락했다. 두 사람 모두 첫 공모전 출전이었기에 수상보다는 참여에 의의를 두며 즐겁게 시작했다. 주제 선정부터 영상 구성까지 총 2주가 소요됐다. 기획에 돌입한 최 씨와 남 씨는 틈나는 대로 주제를 고민하며 서울의 여러 모습을 계속 상상했다. 그러던 중 '머릿 속 상상을 시각적으로 풀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 끝에 두 사람은 말그대로 ‘상상 속 서울이야기’를 주제로 선정했다. 생각이 많은 최 씨의 성격이 기획에 많은 도움이 됐다고. “원래 공상이나 상상을 자주하는 편이에요. 주변 사람들이 ‘헛소리를 정성스럽게도 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니까요. 상상력이 큰 도움이 됐네요.” ▲지난 1월 5일 진행된 인터뷰에서 최현준(왼쪽) 씨와 남정연 씨가 공모전 참가 계기와 진행 단계를 설명하고 있다. 후반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먼저 두 사람은 상상을 각본으로 정리한 후 서울 촬영에 돌입했다. 촬영일은 단 하루였다. 대여한 카메라를 반납해야 했기에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새벽부터 촬영을 나선 두 사람은 늦은 밤이 돼서야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서울역, 인왕산, 한강 시민공원 등 서울 전역을 다 돌았다. 남 씨는 “인왕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을 담기 위해 산을 한참 올랐어요. 노을부터 야경까지를 담아내기 위해 무턱대고 올라가 4시간을 거기 있었죠. 힘들었지만 재미있게 촬영했던 것 같아요.” ▲남정연씨는 인터뷰에서 "힘들었지만 즐겁게 촬영하고 편집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업무를 나눠 서로의 전공과 재능을 살려 영상에 녹였다. 전반적인 편집은 최 씨가 맡았다. 영상 학회에서 갈고 닦은 실력을 마음껏 뽐냈다. 촬영된 영상을 편집하고, 편진됩 영상에는 3D 모션 효과를 입혔다. 영상에 포함되는 자막, 타이포 등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남 씨가 맡았다. 기획부터 편집까지 총 3주가 넘는 시간이 소요됐다. 학교 생활과 병행하면서 밤을 새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두 사람은 "사실 혼자 도전했으면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하며 힘들었던 순간을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밤을 새며 디자인에 매달리는 것이 저희의 일상이고, 함께 출품할 작품이기에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 노력한 것 같다"며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디자인을 향한 애정, 그리고 꿈 ▲사진 왼쪽의 최현준(엔터테인먼트디자인학과 3)씨와 남정연(커뮤니케이션디자인 3)씨는 "디자인을 업으로 삼겠다는 꿈은 확고하다"며 미래에 대한 다짐을 밝혔다. 최 씨와 남 씨는 현재 방학을 맞아 각각 디자인 관련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다. 우리대학과 연계된 현장실습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했다. 두 사람 모두 4학년 진학을 앞두고 진로 고민 해소를 위해 다양한 활동에 도전 중이다. 영상 업무를 맡고 있다는 최 씨는 “영상을 만드는 일이 잘 맞고 재미있다"며 "클라이언트를 실제로 만나고 상대해보는 경험이 향후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꿈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남 씨 역시 “처음 실무를 맡아 일하면서 어떤 회사, 어떤 직무를 가고 싶은지 더욱 분명해졌다”며 “디자인을 업으로 삼겠다는 꿈은 확고하기에 더욱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두 사람은 "디자인이 아닌 그 어떤 일을 하면서도 몇날 며칠 밤을 샐 수는 없었다"며 "남은 대학생활동안 더욱 노력해 꿈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글/ 김예랑 기자 ys2847@hanyang.ac.kr 사진/ 최민주 기자 lovelymin12@hany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