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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14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인공지능과 바오밥나무

인공지능이라는 화제 속에는 편리함과 동시에 어쩔 수 없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와 신화 속 바오밥나무라는 렌즈를 통해 인공지능을 바라본다면 이 두려움이 어떻게 바뀔까요? 글. 안연경(의학과 14) / 그림. 안우정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 <어린 왕자>에는 바오밥나무에 대한 흥미롭고도 무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너무 크고 깊게 자란 바오밥나무 세 그루가 어느 별을 점령해버렸다는 이야기인데요. 요즘 우리가 인공지능에 대해 걱정하는 바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으로 인해 직업을 뺏기진 않을지, 인간을 넘어선 인공지능이 오히려 인간을 착취하진 않을지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작년 이세돌 9단을 이겨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알파고는 올해 더 발전한 모습으로 돌아와 중국 커제와의 대국에서 완승했습니다. 일찍이 승패보다는 알파고가 어떻게 이길지에 초점을 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벌써 인공지능이라는 바오밥나무가 우리 키를 훌쩍 넘어서 자라고 있다고 믿는 듯합니다. 그런데 과연 인공지능은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바오밥나무에는 이런 신화도 있습니다. 신이 가장 먼저 창조한 나무가 바오밥나무인데, 정작 이 나무는 다른 예쁜 나무들을 부러워해 자신의 모습을 바꿔달라고 신에게 청했다고 합니다. 결국 신의 노여움을 산 바오밥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한 채 거꾸로 처박히는 신세가 되었다네요. 가지는 아래로, 뿌리는 위로 향한 신화 속 바오밥나무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일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오밥나무의 가지, 줄기 그리고 뿌리 먼저 아래로 향한 가지는 땅 속에 박혀 있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정보를 알려주는 인공지능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공지능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미처 알지 못했거나 분석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방대한 정보를 빠른 시간 안에 알려줄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과학 등 인간이 이미 활동하고 있는 다른 분야까지도 무섭게 침투해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인간의 오랜 꿈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는 편리함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감성으로 영역을 넓혀 인간의 친구 역할까지 할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한편으론 두려운 인공지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 시작은 우리 눈에 보이는 바오밥나무의 줄기부터입니다. 인공지능이 각각의 가지마다 모은 여러 정보는 줄기라는 패러다임으로 흘러들어옵니다. 이 패러다임은 인간이 결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어떤 정보가 필요하고 그 정보를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따름입니다. 예를 들어, 운전이나 교육 등의 활동은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있겠지만, 운전을 해서 무엇을 어디로 보낼지 혹은 누구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지와 같은 큰 틀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입니다.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지능이 분석을 하거나 학습을 통해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정도의 고차원적 사고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이 생각은 바오밥나무의 뿌리로 이어집니다. 뿌리는 인공지능의 사바오밥나무고방식입니다. 인간 뇌와 달리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그칩니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이자 우리의 자리를 뺏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사고 회로를 모방해 빠른 시간 안에 학습하는 프로그램을 탑재했다고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직 인간 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인간은 삼각형을 그려 놓고 ‘산’이라고 서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단순화 과정이 뇌에서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치 땅에 박혀 있어 보이지 않는 보통 나무들의 뿌리처럼, 우리조차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사고를 인공지능이 넘어설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인공지능의 사고방식은 거꾸로 박힌 바오밥나무의 뿌리처럼 훤히 보이니까요. 인간과 인공지능의 평화로운 공존 지금까지 인공지능이 인간을 넘어설 수 있을지 바오밥나무를 통해 알아봤습니다. 사실 인공지능이라는 바오밥나무가 무분별하게 자라 인간이라는 별을 점령한다고 해도 우리에겐 마지막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전기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물론 농담입니다. 인공지능은 결국 인간이 인간 자신을 위해 개발한 것이고, 그렇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혀 인공지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인공지능을 우리에게 이롭게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특히 윤리적인 측면에서 인공지능을 통제할 방법을 합의할 수 있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의 평화로운 공존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4

[오피니언][건강한대] 꾸준한 자외선 차단으로 평생 피부 건강 지킨다

자외선은 피부 표면에 있는 균과 피지선 땀구멍 등에 있는 균을 죽이며, 칼슘의 신진대사와 뼈를 만드는 데 필요한 비타민D를 합성한다. 또 피부과적 질환의 치료에 이용되는 등 사람에게 이로운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일광화상, 광과민성 피부 질환, 광노화, 피부암 등의 비정상적인 반응을 초래하기도 한다. 글. 노영석 교수(한양대학교병원 피부과) / 그림. 안우정 자외선의 해악 A to Z 자외선에 의해 발생하는 대표적인 피부 반응은 홍반반응과 색소침착이다. 홍반반응은 자외선 노출 직후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즉시홍반반응과 자외선 노출이 지속될 경우에 나타나는 지연홍반반응이 있다. 색소침착은 자외선 노출 직후 주로 UVA에 의해서 일어나서 수분 내에 소실되는 즉시색소침착과 자외선 노출 3일 후에 주로 UVB에 의해서 일어나는 지연색소침착이 있다. 즉시색소침착의 경우에는 멜라닌의 산화와 멜라닌 과립의 기저층으로의 이동이 증가해 발생하지만, 지연색소침착의 경우에는 멜라닌 세포의 증가에 의해 발생한다. 일광화상은 강한 햇빛에 피부가 노출되면 노출 부위에 홍반과 가려움증이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4~8시간 후에 나타나 24시간 후 최대에 이르며 3~5일 경과 후 색소침착을 남기고 서서히 소실된다. 중증일 때는 홍반 외에도 물집이 형성되고 통증이나 부종이 동반되기도 하며 일주일 이상 고생한다. 손상된 피부는 자외선 노출 10~14일 후 아래쪽에 새로운 피부가 재생되면서 박리되어 떨어져 나간다. 하지만 일단 검게 탄 피부가 원래의 피부색으로 되돌아가기까지는 수개월이 필요하다. 광과민성 피부 질환은 광선 자체가 원인이거나 광선이 질병의 발생에 관여하는 경우를 말한다. 원발성, 외부의 화학 물질, 유전 및 대사성, 광선에 의한 기존 질환 악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주로 광선 노출 부위에 다양한 피부 병변이 관찰된다. 광노화란 자외선, 주로 UVB에 의해 피부 노화의 자연적인 과정이 촉진되는 것으로 만성적으로 과도하게 태양광선에 노출돼 발생한다. 진피 내의 교원섬유가 감소하고 피지 분비가 줄면서 피부가 건조해지며 모공이 넓어진다. 또 피부가 탄력을 잃고 거칠어지면서 잔주름과 깊은 주름이 생기고 불균일한 색소침착을 일으킨다. 강한 햇볕을 지속적으로 오래 쪼이는 것은 진피 내 세포의 DNA를 손상시킨다. 이것이 피부 종양으로 발전해 편평상피세포암, 기저세포암, 흑색종과 같은 악성 종양을 일으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외국에 비해 피부암이 차지하는 비율이 낮지만 피부암 환자는 해마다 건강한대늘고 있는 추세다. 자외선 관리는 어린 시절부터 자외선의 파장은 200~400nm인데 이를 다시 파장에 따라 세분화하면, 320~400nm를 자외선A, 290~320nm를 자외선B, 200~290nm를 자외선C로 구분할 수 있다. 자외선A는 주로 진피에 작용해 광노화, 광발암 현상에 영향을 주며 노출 시 피부를 붉게 만들거나 검게 그을리게 한다. 자외선B는 주로 표피에 작용하며 급성 피부 반응으로 홍반, 부종, 동통 및 발열 등의 일광화상을 일으키고 종양에 대한 면역 감시 기능의 저하로 피부암을 유발한다. 오존층에 의해 흡수되는 가장 짧은 파장의 자외선C는 자외선B와 같이 피부의 DNA에 주로 작용해 광화학 반응을 일으키며 피부암을 발생시킨다. 최근 환경오염 물질에 의한 오존층의 파괴로 인해 지표에 도달하는 자외선의 양, 특히 자외선C의 양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피부암 발생률 증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성 자외선 노출에 대해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육안으로도 주름이 많아지고 피부가 처지는 것이 확인됐다. 또 종양 발생의 빈도가 높아지며 조직학적으로 피부가 두꺼워지고 콜라겐 섬유가 감소됐음이 보고됐다. 태양광선에 노출되는 부위와 노출되지 않는 부위에 각각 자외선을 쪼인 후 피부가 거칠어진 정도의 차이를 나이에 따라 비교한 외국의 연구를 보면, 소아에서 성인보다 그 차이가 적은데 이것은 소아가 성인보다 특별히 자외선에 민감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대상자 수는 적지만 인체 표피의 자외선 투과율에 관한 국내 연구에서도 나이에 따른 차이는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젊은 연령에서는 야외 활동 시간이 성인에 비해 훨씬 길어 평생 노출되는 일조량의 80%를 18세 이전에 받는다는 보고가 있다. 따라서 자외선에 의한 만성적인 손상은 평생 동안 자외선 노출이 축적되어 생기는 것임을 생각할 때 어린 시절부터의 자외선 관리는 매우 중요하다.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4

[오피니언][타임머신] 진사로의 언덕 오르던 87년의 기억 속으로

입학한 지 30년이 지난 이야기를 다시 더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마치 어제처럼 가깝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미러 없는 인생은 질주의 피로감을 쉽게 느낀다. 가끔은 뒤를 돌아볼 줄 알아야 건강하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87년을 회상하는 시간은 내 마음속에 새로운 에너지를 솟구치게 하는 작은 축제인 듯싶다. 축제를 즐기러 가는 기분으로 그 시절의 행당동과 사근동을 다시 걸어본다.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 한기수((주)필옵틱스 대표·물리학과 87) 동문 등산을 하는 거야? 등교를 하는 거야? 나는 부천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한양대를 등하교하기에는 참 먼 거리였다. 한양대는 부천과 가까운 서울 서쪽도 아니고, 저기 동쪽 끝에 붙어 있지 않은가. 전철도 한 번에 가지 않는다. 1호선을 타고 사람들이 북적대는 신도림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탄다. 당시에는 지하철 노선이 네 개뿐이었다. 그래서 가는 길도 단순했다. 지방이라고 얘기하기도 애매한 부천에서 다니려면 두 시간 이상의 등교 시간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자취와 하숙을 선택했다. 그러나 학교와 가깝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의 모교 한양대는 참으로 높은 곳에서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강의 시간에 늦을 것 같으면 당연히 뛰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 높은 한양산(?)을 뛰어올라야 했다. 겨우 강의실에 도착하면 땀이 범벅이 되어 숨 고르고 땀 식히느라 10여분은 교수님의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체력만큼은 그 어느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지금 이 사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며 지치지 않는 에너지를 유지하는 것도 그 시절 모교의 언덕이 키워준 힘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공부했던 자연과학대는 두 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나는 인문대 방향의 108계단과 또 하나는 사회대 방향의 계단. 두 계단 모두 만만치 않지만 인문대 쪽 계단은 도중에 한 번은 쉬어야 할 정도로 힘든 구간이다. 이 구간을 오르는 여대생들의 기분은 어땠을까? ▲ 87년 당시의 자연대 건물 시국보다 더 어수선했던 신입생 시절 87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격동의 시기였다. 그러나 신입생에게 동문시국은 그냥 흐르는 물이었다. 그 물에 멋모르고 발을 담그는 사람이 있었고, 그 물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입생은 그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수선했다. 아니 공부에 시달렸던 고교 시절을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소위 말하는 대학의 낭만을 만끽하고 싶어 했다. 지금은 사라진 사범대 앞 잔디밭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고 심지어 진달래 지짐을 해먹는 친구도 있었다. 1학년 1학기는 캠퍼스 안팎을 탐방하는 시기였다. 대출 목록을 작성하는 중앙도서관도 새로웠고, 88서울올림픽 배구 경기장으로 활용되는 체육관도 신기했다. 축제 시기에는 노천극장에서 종종 공연이 열렸다. 안치환, 신형원 등 가수들의 공연을 본 기억이 난다. 학교 밖은 놀거리가 더 풍부했다. 돈 없는 자취생이었지만 당구장에서 짜장면 내기를 했고, ‘이모네’에서 선배들과 젓가락을 두드리며 술도 마셨다. 그 나이 또래들이 그렇듯 싸고 맛있는 안주는 순대와 떡볶이였다. 이걸 먹을 수 있는 곳이 학교에서 나와 건널목을 건너면 나오는 먹자거리, 그 한가운데 있는 ‘한양뷔페’다. 이것저것 먹을 게 많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 학교 정문에 개교 기념행사로 진행한 행당제전 홍보물이 세워져 있다. ▲ 진사로에 걸쳐져 있는 다양한 현수막들 학창 시절 키워드는 대자보, 동문회, MT 내 기억으로는 그 당시 교가가 두 가지 버전이었다. 하나는 집회를 나가는 학생들이 부르는 교가로 “행당언덕 넓은 터 남청색 진리 아래 모인 우리들~”로 시작하는 노래고, 또 하나는 우리 모교를 세운 김연준 설립자 님이 작곡한 “한양, 한양 무궁하도록~”이라고 부르는 노래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생각나는 세 가지 키워드는 대자보와 동문회 그리고 MT다. 대자보는 진사로를 걷다보면 늘 마주치는 대학 내 뉴스다. 나무 사이에 걸린 현수막에는 토익, 토플 강좌를 안내하는 내용이 넘쳐났고, 나무에는 동문회 모임을 알리는 포스터가 색깔별로 붙어 있었다. 교내 신문인 학보도 기억난다. 그 당시 학보는 학교 소식을 알기 위한 기본 목적보다는 다른 대학의 여대생들과 미팅한 후 편지를 주고받는 창구 역할을 했다. 신입생을 설레게 하는 것 중의 하나는 MT였다. MT는 대학의 낭만이었다. 주로 청량리역에서 모여 경춘선을 타고 대성리나 청평으로 갔다. 북한강변에서 캠프파이어를 하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한양대 캠퍼스를 거닐며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는 연예인을 본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문대에는 연극영화학과가 있었는데 탤런트 박순애와 개그우먼 박미선, 강변가요제에서 상을 받은 꺽다리 이상은 등 TV에 출연하는 탤런트, 개그맨, 가수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동기들의 힘을 하나로! 87홈커밍데이 모교 한양대는 전통적으로 이공계가 강한 대학교다. 지금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모교 출신 선후배들의 활약상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한양대 출신들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맹활약 중이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후배들이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부분이다. 얼마 전 모교를 들른 적이 있다. 학교가 몰라보게 달라졌다. 2호선 한양대역 2번 출구를 나오면 바로 한양대 캠퍼스 안마당으로 연결된다. 전철역이 학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학교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걸 의미한다. 자료를 복사하던 가게는 아직도 있었지만, 내가 즐겨 찾던 술집이나 당구장은 거의 없어지고 프랜차이즈 전문점 등으로 바뀌었다. 학교 건물도 87년도와 비교하니 엄청 늘었다. 낡은 건물들은 모두 새롭게 리모델링됐다. “참 좋아졌네”라는 감탄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78년 역사의 명문 사립대학다웠다. 기억은 단편적이다. 단편적인 기억은 추억이 된다. 그런데 그 추억이 모여 역사가 되는 법이다. 나는 올해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 87학번 홈커밍데이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홈커밍데이는 87학번 한양인을 위한 행사다. 이 행사는 우리가 다녔던 그 시절 한양의 추억과 기억을 다시 돌아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특별한 기억을 함께한 87학번 동기들이 이 글을 통해 그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고, 홈커밍데이를 통해 모범이 되는 학번으로 힘을 모았으면 한다. 이 자리를 빌려 87학번 홈커밍데이에 동기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활동을 부탁한다. 한양대의 역사는 78년의 한 페이지들을 채운 선후배들의 기억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87년도를 회상하며 나는 우리 모교의 힘을 다시 느끼고, 그 시절 나를 키웠던 에너지를 만난다. 한양대, 네가 있어 지금의 내가 있다. 사랑한대, 한양! 사랑한대 2017년 9-10월호 이북 보기

2017-09 11

[오피니언]호칭이 애매하다고? 호칭에 쫄지말자!

살면서 우린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한 심리학자는 사람이 한 평생동안 대략 3,500명의 사람들과 친분을 맺게 된다고 했다. 지금은 멀어진 사이일지라도, 우린 이미 초중고를 거치며 십 여명의 담임교사와 수십명의 교과목 교사, 몇 백명의 동창들과 알고 지냈다. 평균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수긍 가는 숫자다. 그런데 우린 서로를 부를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든 모르든, 그저 이름으로만 대하지 않는다. 김 교수님, 아무개 형, 혹은 그저 선생님. 막역한 친구가 아닌 이상 호칭은 상대를 부를 때 필수다. ▲대화할 때 서로에 대한 존중은 필수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호칭을 부르는 건 생각보다 간단하다. 상대의 직업이 중요하면 직업으로, 나와의 관계가 중요하면 그 관계를, 그저 존칭이 필요할 땐 ‘선생님’ 등의 호칭으로 부르면 된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명명이 까다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상대와의 관계가 하나로 정리돼지 않을 때. 선배와 형 누나, 혹은 언니 오빠. 선배라 부르는 건 조금 딱딱하고, 그렇다고 편하게 부르기엔 아직 낯선 상대다. 특히 재수 등의 이유로 늦게 입학한 이라면 더 머리가 복잡하다. ‘저 선배는 나랑 동갑일까? 동생인가? 선배라 하면 어려워할까? 편하게 부르면 막 대하는거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왜 호칭이 존재하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가장 먼저, 호칭은 내가 인식하는 상대를 재정의한다. 가령 교수에게 교수님, 조교에게 조교선생님 등으로 부르는 건 곧 내가 상대를 그런 직책으로 인식하고, 또 존경의 표시로 ‘님’과 ‘선생님’을 붙였단 얘기다. 혹은 추후 회사에서 이 부장, 김 대리 등으로 서로를 부르는 것 또한 서로를 ‘바로 그 직책’의 사람으로 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호칭은 때론 위세를 지니고 있기도 하며, 반대로 존중과 존경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형, 언니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이유다. 둘은 동성의 연장자에게 쓰는 호칭이다. 이를 쓴다는 의미는 상대를 별다른 직책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보다 인격적이고 가까운 상대로 곧 친밀한 상대로 인식함을 담고있다. 다시 말해 화자가 청자를 가까운 사이로 인식하는 중이다. 상대방의 호칭을 고민한다는 얘기는, 정리하면 상대방을 학교에서의 관계로 불러야 할지, 혹은 보다 친밀하게 불러야 할지 고민한다는 얘기가 된다. 즉 이 고민은 ‘난 저 사람과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보다 편하게 부르기엔 어렵다’는 얘기도 되겠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고민하지 말자. 애초에 호칭은 서로에 대한 인식을 확인하는 동시에, 상대에 대한 존중이 담긴 표현이다. 상대와 나 상호간의 약속이, 다른 이들의 말보다 중요하다. 호칭을 부르는데 있어 어렵다면, 상대와 터놓고 얘기하자. “저… 선배라 부를까요 형이라 부를까요?”처럼 말이다. 아마 “선배가 편해”나 “편한대로 불러” 등 아주 간단하게 약속이 정해질 거다. 혹여나 저 질문에 화를 내는 선배가 있다면, 그땐 상대가 뭐라든 ‘선배’라며 존칭을 쓰기를 권한다. 관계는 그토록 중요하면서도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호칭은 결국 대화 당사자끼리 정하면 되는 문제다. (자료사진/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글/ 이상호 기자 ta4tsg@hanyang.ac.kr

2017-08 23

[오피니언][타임머신] '사근동 시절'을 추억하다

▲ 대학을 조업할 때까지 살던 낡은 사글셋방 자리에는 4층짜리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12만 원짜리 사글셋방으로 기억한다. 별도의 화장실도 없는, 오래된 단층 단독주택 별채에 딸린 허름한 방 한 칸에 불과했다. ‘주방’보다는 ‘부엌’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공간에 쭈그리고 앉아 고무호스를 잡고 한 손으로 머리를 감았다. 온수는 나오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 기억은 불분명하다. 한양대 국문학과 재학 시절, 나는 주로 혼자였다. 학교 후문으로부터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사근동 셋방에서 졸업할 때까지 혼자 살았다. 밥은 학생회관이나 학교 근처 식당에서 혼자 먹는 둥 마는 둥 때웠고, 공부나 과제도 혼자 대충 해결했다. 가끔은 늦은 밤부터 이른 새벽까지 후문 근처에 있는 PC방에서, 역시 혼자 놀았다. 잠이 오든 말든, 12만 원짜리 셋방에서 가만히 혼자 누워 지낸 시 간도 많았다. 대학 졸업 직후에도 꽤 오랫동안 독거인으로 지냈으니, 대학 시절의 경험이 아주 낯선 것만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유독 고립감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좁디좁은 셋방에 몸을 누인 나는 그때 주로 어떤 몽상으로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시기가 내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다. ▲ 한양대 후문에서 이어지는 서울 성동구 사근동 골목 IMF 외환위기 직후, 불안의 시대 대학 졸업이 다가올수록 낯선 불안감을 종종 느꼈다. 어디론가 가야 하는데 갈 곳은 없는 처지, 취업난에 내몰린 것이다. 취업난은 해마다 거듭된다. 대졸 예정자의 취업률 곡선이 어떻게 휘고 꺾이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해보지 않았으니, ‘그때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근거는 없다. 청년 실업이라는 단어를 유행가 가사처럼 듣고 있는 지금과 비교하면, 약 20년 전 내가 경험한 취업난은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할 수도 있다. 청년 실업 장기화를 겪고 있는 지금의 청년 세대가 우울하다면, 약 20년 전 우리는 불안했다는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다. 굳이 비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만 약 20년 전 우리 앞에 놓인 취업난을 애써 기억할 만하다면, 그건 단연 ‘IMF 외환위기’ 탓이다. IMF 외환위기 사태가 불거진 것이 1997년 12월이었고, 그 여파는 내가 대학 4학년이던 1999년까지 이어졌다. 사회 진출을 앞두고도 딱히 진로를 정하지 못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튼 몇몇을 빼면 거의 대다수가 ‘미취업자’ 신세였다. 문 닫는 기업이 속출했으니 일자리가 증발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여럿이 함께’의 소중함 불안의 시대에 위로가 된 것은 고통이라면 고통이었을 당시의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라 우리 모두, 곧 집단의 몫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IMF 외환위기 직후 학교를 떠나야 했던 우리는 모두 불안했으니 경쟁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를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볼 뿐 내가 주저앉혀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원초적 연대 의식이었다. 가끔 이름을 들으면 알 만한 기업의 채용 시험에 최종 합격한 동기를 위해서는 진심으로 축하를 보냈다. 그런 일이 자주 벌어지지는 않았다. 불안감이 커질수록 학교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학교에 있는 시간은 내게 소중하게 다가왔다. 처지가 비슷한 동기를 만나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아도 좋았고, 인문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 느끼는 가을바람도 좋았다. ‘일삼팔(138) 계단’이라고 부르던 그 길을 오르던 시간, 잠시 그 길 위에 멈춰 내려다보던 행당동 풍경도 근사했다. 1999년 늦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길언 교수님은 졸업을 앞둔 ‘예비 백수’들에게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시간이 오래 지나 현 교수님의 말씀이 머릿속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얼기설기 다시 엮어보면 이렇다. “취업이 어려워서 다들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로 안다. 졸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당장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조급함도 느낄 수 있다. 졸업 이후에도 1~2년 정도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지낼 수도 있다. 인생 전체에서 그렇게 백수로 지낼 수 있는 시기도 많지 않으니, 너무 조급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각자의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좋다.” ‘현대소설론’이었던가, 마지막 수업 시간에 들려주신 현 교수님의 말씀은 나를 비롯한 여러 예비 백수에게 적잖은 힘이 됐다. ▲ 2000년 2월 25일 국어국문학과 졸업 사진 여유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로도 8개월 남짓 백수로 지냈다. 그 뒤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올해로 기자 경력 18년째를 맞았다. 자신이 맡고 있는 분야에 관한 취재를 한 뒤 기사를 내보내면 끝. 기자의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우리 일에 관한 가장 간결하고 정확한 설명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게 일부의 사실에 불과하다는 데에 있다. 소규모 신문사에 있을 때에는 좀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정작 내가 원하는 신문사에 입사한 뒤에는 선후배 동료보다, 같은 분야를 담당하는 타사 동료보다 빼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강인한 ‘멘탈’과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과의 경쟁이 아닌 내가 기자가 되고자 했던 이유에 집중해야 한다. 다른 누구를 바라볼 시간에 자신과의 대화에 좀 더 투자해야 한다.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데, 어쨌든 노력해야 한다. 이따금 사근동(혹은 한양대)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졸업한 뒤 많은 것이 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현길언 교수님은 정년을 마친 뒤 퇴임했다. 한양대역과 학생회관을 직통으로 연결하는 지하철역 출구가 생겼다는 소식에 감탄했고, 일삼팔(138) 계단이 ‘일오팔(158) 계단’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에 한참 웃었다. 내가 졸업할 때까지 머문 12만 원짜리 사근동 셋방은 헐렸다. 그 자리에는 4층짜리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그 어둡고 눅눅한 셋방은 이제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도대체 그때, 내 머릿속에는 무슨 ‘쓸데없는’ 잡생각이 그리 많았던 건지 여전히 궁금하다. 문득 그때의 고요함이 그립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8 16

[오피니언][건강한대] 당신의 장은 건강합니까?

장 점막이 손상되어 염증이 생기는 질병인 장염. 소장염, 대장염으로 구분 짓기도 하는 장염은 음식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일반적으로 여름에 생긴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장염의 원인은 음식물 외에도 다양하며 계절에 상관없이 발병한다. 글. 이항락 교수(한양대학교병원 소화기내과) / 그림. 안우정 장염을 일으키는 다양한 원인 끼니를 자주 거르거나 과식과 폭식을 하고, 육류 등 고열량식을 자주 섭취하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면 장 건강에 더욱 유의해야 한다. 장내 세균에 의해 부패 물질이 많이 발생해 장염, 과민성 대장염과 같은 장 질환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장염의 원인은 감염성과 비감염성으로 나눌 수 있다. 감염에 의한 장염은 크게 세균성 장염과 바이러스성 장염으로 나뉜다. 세균성 장염은 대장균과 같은 일반 세균에 의해 장염이 발생하는 것이다. 장티푸스, 이질, 콜레라 등 치사율이 높은 장염도 세균성 장염에 속한다. 주로 위생 상태가 불량하기 쉬운 여름에 식중독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바이러스성 장염은 가장 흔한 장염이다. 여름보다는 늦가을에서 초봄에 걸쳐 유행한다. 특히 ‘가성 콜레라’라고 부르는 로타 바이러스는 바이러스성 장염을 일으키는 대표적인 원인이다. 비감염성 장염은 너무 차거나 매운 음식을 많이 먹거나 폭음, 폭식, 약물에 대한 알레르기 등의 원인으로 발병한다. 장이 약한 사람이 과로한 경우 나타나기도 한다. 만성 장염의 원인은 다양하다. 급성 장염이 적기에 치료되지 않으면 만성 장염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만성 장염으로 시작되는 경우도 있다. 직장인에게 흔히 보이는 과민성 대장염은 장이 지나치게 민감해져 나타난다.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장의 운동 기능 이상, 스트레스와 같은 심리적 요인, 장염 등으로 인해 장의 감각이 과민해져 신체 조절 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인이 확실치 않아 완치가 힘들며 재발이 잘 되고 오랜 기간 불편을 초래한다. 설사, 복통, 구토, 발열 증상 감염성 장염에 걸리면 장 점막에 염증이 발생해 소화 흡수에 장애가 생긴다. 설사, 복통, 구토, 발열 등이 일어나고 하루에도 여러 번 설사를 하게 되며, 이로 인해 탈수증을 일으켜 전신 쇠약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복통이 나타나는 경우에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는 묵직한 통증이 가장 흔하다. 이렇게 시작해 뒤틀리는 듯이 심하게 아픈 통증으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심하면 탈수로 인한 쇼크가 나타나기도 한다. 만성 장염은 급성 장염 증세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몇 개월 또는 몇 년간 증상이 계속되면서 배변이 불규칙해지고 지속적으로 설사를 하게 된다. 설사 대신 변비가 있기도 하며 때로 설사와 변비가 반복되는 경우도 있다. 복통은 어느 한 부위가 계속 건강한대아프기보다는 돌아가며 여러 부위에 무거운 통증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변을 보아도 시원치 않고 남아 있는 느낌이 들거나 장출혈로 인해 변에 피가 묻어나오기도 한다. 구토가 나거나 식욕 부진, 복부 팽만감, 소화 흡수 장애로 인해 영양 상태가 나빠져 빈혈이나 체중 감소를 동반하기도 한다. 대변에 피가 묻어 나오거나 잠에서 깰 정도의 심한 복통, 체중 감소와 같은 동반 증상이 있는 경우에는 다른 질환이 있는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다. 장염에 걸리지 않으려면 이렇게 균이나 바이러스를 통해 감염되는 급성 장염의 경우에는 음식의 청결 상태가 상당히 중요하다. 음식을 만들 때는 손을 청결히 하고 신선한 식재료를 선별해 구입하며 음식을 사 먹을 때는 위생 상태가 좋은 음식점을 선택한다. 너무 차갑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장 건강에 특히 해롭다. 더욱이 여름철에는 장의 기력이 약해져 자극적인 음식을 조금만 섭취해도 장염에 걸릴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스트레스가 주원인인 만성 장염은 일단 스트레스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장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만성 장염에 걸리기 쉬우므로 평소 배를 따뜻하게 하고 너무 차거나 맵거나 딱딱한 음식 등은 멀리하는 생활 습관이 필요하다. 무조건적인 지사제 사용은 금물 장염의 치료는 우선 환자를 안정시키고, 탈수 증세를 호전시키기 위해 수액을 보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설사 증세를 보인다고 임의로 지사제를 복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세균성 장염인 경우 원인균을 치료하지 않은 채 설사만 멈추게 하면 장 속의 독소가 제대로 나오지 못해 증상이 악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균성 장염에 걸렸을 때는 의사의 지시에 따라 원인균에 맞는 항생제, 항균제 등 약물 치료를 한다. 비감염성 장염의 경우 복통의 원인이 되는 음식물을 제거하기 위해 하루 이틀 절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심한 복통에는 진경제(근육의 경련을 가라앉히는 약)를 쓰기도 하며 설사를 멈추기 위해 지사제를 투여하고, 탈수가 있으면 수액을 보충해 준다. 약물 치료를 병행하면서 하루 이틀 수분만 섭취하는 것이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 그 후 식사는 유동식에서 시작해 반유동식, 연식, 경식 등으로 증세에 따라 점차 바꾸어 간다. 고지방식이나 생 채소, 자극성 음식물은 회복 후에도 한동안 금하는 것이 좋다.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8 16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나의 마지막 여름 방학

추운 겨울보다는 더운 여름이 좋다. 차갑게 내리는 장맛비보다는 포근하게 내리는 함박눈이 좋다. 나에게 여름 방학은 '좋아요'와 '싫어요' 그 사이였다. 글. 한지연(신문방송학과 14) / 그림. 안우정 방학마다 찾은 부산, 내 고향 ‘아무래도 난 돌아가야겠어. 이곳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화려한 유혹 속에서 웃고 있지만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해.’ 기숙사에서 혼자 로이킴의 노래 ‘서울 이곳은’의 첫 소절을 듣고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울음이 터진 날을 기억한다. 20년을 부산의 어느 바다 앞에 살던 아이의 안산 생활도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들었다. 부산을 벗어나면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그곳을 너무나도 떠나고 싶었다. 그렇게 스물세 살이 되었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타지 생활. 힘들어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결국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다는 것을 부산을 떠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 그렇게 그곳을 도망가고, 벗어나려 했나 싶어서 혼자 펑펑 울기도 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리나케 부산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 동생들이 그리웠고 친구들과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하지만 방학에도 학교 근처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첫 번째 여름 방학은 학회, 두 번째는 학보사, 세 번째는 대외 활동이 나를 기다렸지만 나는 늘 부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이 있을 때마다 무궁화호를 타고 왕복 10시간의 통학을 감수해야만 했다. 방학 중에 학보사 기획 회의가 끝나고 다른 기자들이 지하철역으로 향할 때 나는 기차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들 출발한 지 1시간도 채 안 되어 집에 도착할 때 나는 긴긴 시간을 무궁화호에서 보내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그런 나를 미련하게 바라봤던 서울 사람들. 그런데도 방학마다 내가 집으로 향했던 것은 지치고 힘들었던 안산에서의 생활을 접어두고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부산으로 잠시 찾아와 쉴 수 있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는 없다. 부산으로 갈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방학 그 ‘끝’에는 내가 돌아가야만 하는 곳이 있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좋아요’와 ‘싫어요’ 딱 그 사이였다. 다시, 로이킴의 노래 한 소절. ‘하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야. 휴식이란 그런 거니까.’ 나에게 지금까지의 여름 방학은 그런 의미였다. 4학년 방학이 갖는 의미 방학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 기간 수업을 쉬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또 다른 수업에 뛰어들기 위해, 스스로의 수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종강하면 마지막 여름 방학이겠구나.” 종강을 앞둔 4학년 학생들에게 교수님이 던지신 말씀. 그 한마디에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4학년’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당연히 부산행이던 내 여름 방학이 이번은 조금 다를 것 같다. 다들 무언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도 뭔가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스스로를 짓눌렀다. 새내기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4학년이라는 현실이 밉고 싫기만 하다. 난 아직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내가 할 수 있는 ‘하계 인턴’과 ‘하반기 인턴’ 등 할 일을 찾느라 손도 마음도 바쁘다. 수업이 끝나면 적막만이 기다리는 자취방으로 돌아와 노트북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나 대신 ‘나’를 말해줄 이력서와 자기소개방학서를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진 자기소개서는 곧 좋은 소식을 가져올 것처럼 당차게 내 손을 떠나버리지만 며칠 뒤 “죄송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돌아온다. 바다와 가족을 만나러 가기 위해 방학을 기다리는 내가 아닌, 방학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좌절하는 4학년의 마지막 여름 방학 앞에 서 있다. “4학년인데 이번 방학에는 뭐할 거야?” 요즘 나에게 안부 인사처럼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많고, 나 스스로 묻기도 하는 이 질문. 대체 4학년의 방학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특별한 경험과 의미 있는 도전을 해야 할 것처럼 ‘마지막’이라는 수식어가 거창하게 다가온다. 여전히 부산이 그립고 바다가 그리워서 여름 방학이 오길 기다리다가도 마지막 여름 방학이 무섭고… 어디로 훌쩍 떠나버릴까 하다가도 통장 잔고를 보면 속상하고… 그냥 모든 것이 복잡하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볼 사람도 없고, 정답도 없어서 두렵고 불안하기만 하다. 2017년 마지막 여름 방학,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뜨거운 햇살과 차갑게 내리는 장맛비 속의 내가 무엇을 하고 있을지, 어디에 있을지도 아직은 모른다. 그래도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나를 성장시켜주고 또 다른 나를 향한 발걸음이라고 생각해야지. 그저 스물세 살 여름 방학의 끝엔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진 나를 만나고 싶다는 다짐만 반복하며 나의 마지막 여름 방학을 기다린다. ‘좋아요’와 ‘싫어요’ 그 사이 어중간한 위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방학을. 사랑한대 2017년 7-8월호 이북 보기

2017-05 30

[오피니언][짧은 글 긴 이야기] 다르게 생각하라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인공지능의 엄청난 발전에 따라 일자리가 점점 줄어들 것이라는 예측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준다.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문제들은 복합적이기 때문에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과학적 사고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시대의 변화가 너무 빠르고, 발전의 방향이 급진적이기 때문에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예측은 빗나가게 된다. 그래서 과거가 아닌 미래에 집중함으로써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에 파괴적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이다. 글. 한승현(3D Maker·독어독문학과 15 한지희 학생 학부모) / 그림. 안우정 미래에 집중한 문제 해결 방법 디자인 사고의 핵심은 ‘인간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고를 하기 전, 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 그 사람의 문제를 알기 위해서 공감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숨어 있는 문제를 찾아야 한다. 이때 주의할 점은 추측하지 말고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를 찾은 후에는 문제를 정의한다. 문제 정의가 가장 중요한 단계다. 좋은 문제 정의는 좋은 아이디어 도출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의할 때는 ‘진짜 문제인가?’,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가?’, ‘영감을 주는 문제인가?’의 세 가지 원칙을 사용한다. 이를 적용한 문제 정의의 결과물이 관점 서술문인데, ‘누가? 어떤 이유로 ~한다. ~하는 방법은 없을까?’의 형식으로 작성한다. 아이디어 도출은 문제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이때는 자유분방하게 아이디어를 내야 한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서는 늘 ‘Yes’라고 답하며, 그 의견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추가해야 한다. 아이디어를 많이 내야 보석 같은 좋은 아이디어를 찾을 수 있다. 실례로 디자인스쿨에서는 5분당 100개의 아이디어를 낸다고 한다. 도출된 아이디어 중 최선의 아이디어는 시제품으로 만들어지는데, 아이디어를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시제품에는 스케치, 시나리오, 입체 제작물이 있다. 시제품은 주변에 있는 재료로 가장 빠르고, 수정하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 시제품을 대상들에게 평가받고, 피드백을 통해 디자인 씽킹 과정의 문제점을 파악한다. 이러한 프로세스의 순환을 통해 최선의 아이디어를 찾는 것이 바로 디자인 씽킹이다. 즉, 디자인 씽킹은 답을 찾으려고 하는 사고가 아니라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최선의 아이디어를 찾는 과정 디자인 씽킹은 ‘완벽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에 문제가 존재한다’라는 인식에서 시작된다. 이는 한국의 사고방식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없으면 해결도 없기 때문에 모든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문제가 있다고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또한 디자인 씽킹에는 부정적인 사고가 없다. 문제가 있다고 한 번 인식하면 그 문제에는 반드시 해결책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해결책이 있다. 디자인 씽킹에서는 인간이 핵심이다. ‘누구를 위하여 디자인하는가?’는 디자인 씽킹에서 꼭 필요한 질문이다. 누군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깊이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나와 주변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관찰을 통해서 나와 이웃의 불편한 점을 찾고 기록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디자인 씽킹에서 이루어지는 극단적 협력에서는 타 분야 전문가와 의 협력이 중요하다. 디자인 씽킹 집단은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이디어 도출 과정에서 상대방의 의견에 ‘Yes’라고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나만의 의견을 고집하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로 베이스(zero-base)에서 시작해 다른 사람의 의견을 수용하고 소화한 후 내 아이디어를 추가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 그것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독특한 아이디어가 된다. 이 구조에서는 내가 낸 아이디어가 부정되지 않고, 그래서 ‘극단적인 협력’이 일어난다.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협력하기 위해서는 서로 효과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방식이 필요한데, 여기서 ‘시각화(visualization)’가 사용된다. 시각화에서는 문자와 이미지가 결합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사용한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훌륭한 방법이지만,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만났을 때 서로의 간극을 줄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시각화는 문자에 이미지를 더하는 방식으로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의 의견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또한 시각화 과정을 거칠 때 단어를 이미지화하면서 창의적 발상이 일어난다. 디자인 씽킹의 프로세스 중 ‘공감’에서 수집한 많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도 시각화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처럼 시각화는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기 때문에 단어의 핵심을 이미지화하기 위한 연습에 습관을 들여야 한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5 23

[오피니언][건강한대] 우리 아이 눈 건강을 위한 체크리스트

시력 발달의 핵심적인 시기는 생후 2~3개월 이내다. 물론 이 시기가 지난 후에도 적절한 시자극이 있어야 정상적으로 시력이 발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력 발달을 방해하는 흔한 원인은 무엇일까? 글. 강민호 교수(한양대학교병원 안과) / 그림. 안우정 약시의 원인은 사시와 굴절이상 대개 시력은 6세 정도가 되어야 거의 완전한 발달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안구는 정상이지만 유・소아기에 시력 발달을 위한 적절한 시자극이 부족하면 안경으로 교정해도 정상 시력이 나오지 않는 약시라는 시력 장애가 발생하게 된다. 약시는 전 인구의 2%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며, 국내 취학 전 아동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약시의 유병률은 0.2% 정도로 보고된다. 약시는 주로 사시와 굴절이상(근시, 원시, 난시, 부동시)이 원인의 98% 정도를 차지한다. 기타 기질적 원인으로는 선천백내장, 선천녹내장이 있지만 드물고, 안검하수의 경우 조기에 진단이 되므로 일반적으로 약시는 사시와 굴절이상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만 4~5세에 안과 검진 받아야 사시의 경우 외관상 안구의 정렬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조기에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굴절이상의 경우 외관상으로 알 수 없고, 특히 부동시(오른쪽 눈과 왼쪽 눈의 굴절이 다르거나 또는 같은 종류의 굴절이라도 그 굴절도가 다른 것)의 경우 한쪽 눈의 시력이 좋으면 아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지장이 없어 늦게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약시는 조기 치료가 중요한데, 치료를 시작하는 연령이 낮을수록 시력 회복이 잘 되고 치료 기간을 단축할 수 있다. 만 8~9세 이후에는 시기능과 관련된 뇌기능이 성숙해 더 이상 뇌가 시자극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치료를 통한 시력 호전 가능성이 매우 낮다. 불행히도 국내 보고에 따르면, 약시 환자의 절반 정도가 만 5세가 넘어서야 처음으로 약시 관련 안과 진료를 받는다. 이처럼 치료 시기가 늦어지는 탓에 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시력 또한 완벽하게 발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따라서 시력 발달 장애 증상이 있는 경우 즉각적인 안과 진료를 통해 기질적 원인의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아무 증상이 없더라도 만 4~5세 정도에는 안과 검진을 통해 정상적인 시력 발달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림치료 후 주기적인 관찰 필요 약시의 기본 치료는 굴절이상이 있을 경우 안경을 통해 굴절이상을 교정해서 적절한 시자극이 눈에 도달하게 하고, 약시가 생긴 눈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눈을 가리는 가림치료를 하는 것이다. 약물을 이용한 치료는 제한적이고 부작용이 있어서 가림치료가 약시 치료의 근간이 된다. 눈을 가리는 시간은 약시의 정도, 나이, 순응도에 따라 다르다. 약시가 심하고 빨리 호전시킬 필요가 있는 경우 종일 가림을 하기도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하루 6시간 이상은 치료 효과가 비슷하기 때문에 대개 부분 가림치료로 시작한다. 약시 치료 후 시력이 정상화되더라도 안경이나 가림치료를 중단 건강한대할 경우 다시 약시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치료 후 2년 이상 주기적인 경과 관찰이 필요하고, 약시의 재발 방지를 위해 일정 기간은 유지 치료가 필요하다. 정기적인 검사로 좋은 시력 유지해야 취학 후 시력이 떨어지는 문제로 안과 진료를 받는 경우가 많은데, 시력이 잘 발달해서 나안시력(육안으로 측정한 시력)이 좋더라도 크면서 안구의 길이 성장이 생기면 눈의 굴절 상태가 근시로 진행되기 때문에 나안시력이 떨어질 수 있다. 이런 경우 안경을 착용해서 굴절이상을 교정하게 되면 정상적인 시력을 보이므로 약시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성장에 따른 굴절이상을 적절한 시기에 교정해주고 좋은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6개월에서 1년에 한 번 정도 정기적인 굴절이상의 변화 유무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력 발달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의 증상 (부동시는 증상이 없음)◀ • 생후 3~4개월이 되어도 엄마와 눈을 잘 맞추지 못한다 • 그림이나 책을 너무 가까이서 본다 • 눈 정렬이 바르지 못하고(초점이 이상하거나 몰려 보임), 고개를 기울이거나 옆으로 돌려서 본다 • 눈을 자주 비빈다 • 눈이 흔들린다 • 한쪽 눈만 자주 감거나 눈부셔 한다 • 눈꺼풀이 처져 있거나 눈동자의 색깔이 이상하다 • 미숙아, 유전 질환이 있거나 눈 관련 질환의 가족력이 있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

2017-05 22

[오피니언][타임머신] 배움 그 이상의 가치를 담은 캠퍼스

내게 대학 캠퍼스는 방황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과 회의의 날들이 없었다면 나는 전공과목인 수학에만 집중하고 문학, 철학, 미술 등의 영역으로 관심을 확장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함기석(시인/동화작가·수학과 86) ▲ 친구들과 목포항에서 찰칵!(출처: 함기석 동문) 사색의 숲에서 만난 책들 교문에서 진사로를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1층에 서점과 우체국이 있던 학생회관 건물이 나왔다. 그곳 광장에서 가파른 희망의 계단을 오르면 건물이 하나 나왔다. 자연대와 사회대가 함께 쓰던 곳이었다. 거기서 대학 본관으로 내려가는 길에 작은 쉼터 공간이 있었다. 낡은 나무벤치가 있고 나무들이 많은 그곳을 나는 ‘사색의 숲’이라 부르곤 했다. 그곳엔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과 아름다운 그늘이 있었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있었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나는 친구들 몰래 혼자 그곳으로 내려가 철학책을 읽곤 했다. 랭보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 시인들의 번역시집, 민중문학 계열의 책들을 읽었다. 책에는 내가 모르던 노동자의 삶과 참혹한 현실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울분과 비애가 짙게 배어 있었다. 자본을 매개로 가진 자와 무산자 사이의 대립 구조에서 수탈과 차별이 발생한다는 걸 난 알게 되었다. 이 구조적 모순이 끝없는 대립을 낳고 노동자들의 저항과 분노를 촉발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떤 책도 불구적 현실을 타파할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오히려 이념과 사상이 개인의 생각과 상상을 획일화시키고 문학의 자유로운 형식을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했다. 질문과 낭만과 분노가 어우러진 공간 ▲ 86학번 친구들과 강원도 속초 민박집에서(출처: 함기석 동문) 돌이켜보면 내가 다니던 80년대 중반의 대학 캠퍼스는 단순한 배움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시대의 현장이었고 투쟁의 참여마당이었다. 가치 있고 참된 삶의 방향을 찾기 위한 질문의 공간이었고 낭만의 공간이었다. 어떤 학우에겐 연인과의 아름다운 데이트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미래를 위한 아름다운 설계 공간이었고, 어떤 학우에겐 시대에 대한 분노의 표출 공간이었다. 시위대를 진압 해산하기 위해 전투경찰이 학내까지 진입하기도 했다. 보통 한양대 시위는 학교 정문 앞의 삼거리 광장이 전투경찰과의 대치 공간이었다. 거기서 거센 구호와 함께 전투적인 투석이 이루어졌고 그에 맞대응한 체루가스 살포와 지랄탄 공격이 이어지곤 했다. 따가운 눈물을 흘리면서도 우린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불의에 대한 저항을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비닐 랩을 두른 채 화염병을 던졌다. 시위가 점점 과격해지면 전경들은 곤봉과 방패를 휘두르며 매우 조직적으로 전진해왔다. 검은 철모와 무장한 옷과 방패까지 갖춘 전경대원들을 태운 차량이 학내 진사로 광장까지 밀고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럼 쫓기고 쫓기다 뿔뿔이 흩어졌다가 우린 다시 시계탑에 모여들었다. 그곳은 자연대, 사회대에서 공대, 상대, 인문대, 사범대로 갈라지는 길목이었고 그곳에서 마지막 노래와 구호를 힘차게 외치고는 해산을 했다.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보내다 그 당시 나는 김남주 시인의 시를 접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는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독재의 현실과 참상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비인간적인 삶을 강요당하는 수많은 근로대중들의 삶과 노동 투쟁을 가슴 아프게 새겨내었다. 그에게 시인은 민중들이 불의와 폭력에 맞서 싸워나가도록 둥둥 북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전투의 나팔 소리를 울리는 자이며, 살인과 고문을 자행하는 압제자의 가슴에 창을 꽂는 자였다. 그에게 시는 이 땅의 독재 권력과 맞서 싸운 무기였고, 무사안일에 빠진 소시민들의 의식을 일깨운 날카로운 채찍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 관련 동영상과 자료들 그리고 광주 출신 친구들의 증언을 접하면서 나는 점점 더 깊은 회의와 시대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들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진실과 역사는 대부분 날조된 것이라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더 이상 학교에 붙어 있기 힘들었다. 갈등과 번민 속에서 나는 배낭을 싸매고 무작정 서울을 떴다. 서울역에서 마지막 야간열차에 몸을 싣고 남쪽 바다로 떠났다. 한 달 가까운 시간을 전국을 떠돌다 돌아와 보니 기말고사가 시작되었다. 필수과목이었던 군사훈련 과목인 교련을 비롯해 물리실험, 화학실험 등 여러 과목에서 낙제점이 나왔고 나는 도망치듯 군에 자원입대했다. ▲ 수학과 동기생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출처: 함기석 동문) 어리고 순수했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대학 생활은 참으로 짧다. 친구들과 후회 없이 질퍽하게 놀았고 암담한 시대 속에서 가슴 뜨겁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규락, 은화, 학주, 재진, 원우, 전우, 흥기, 종태 등등 동기생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 또한 치기와 열망에 사로잡혔던 그때 그 시절이 몹시 그리울 거다. 그때 우린 어렸고 세상도 어렸다. 그때 우리의 심장은 뜨거웠고 머리는 경직되지 않았다. 태양도 달도 별도 모두 우리 편이었고 우린 깔깔거리며 세상을 맘대로 주물러 반죽했다. 정말이지 그때 우린 어리고 어렸다. 그래서 순수했고 겁이 없었고 실패가 두렵지 않았다. 돌아보면 대학은 아련하고 아픈 고향집 같은 곳이다. 떠나온 지 30여 년이 지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랑한대 2017년 5-6월호 이북 보기